삼람(三覽)

 

저는 해방되던 이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기 때문에 일본말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식’의 순 한국어 교육세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또래들만 해도 초·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단군조선과 삼국의 시조 등에 대해서 그래도 어느 정도 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벌써 오래 전 신문에도 연재되었고 책으로도 발행된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서희건(徐熙乾)著, 도서출판 고려원刊)를 읽으며 ‘역사교육이 우리가 배우던 때보다도 더 문제점이 많구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중, 고, 대학교에 다니는 아이들한데 몇 가지 물어 보았더니 역시 단군에 대한 것은 물론, 삼국의 시조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머리 속에는 우리 역사는 ‘보잘 것 없고 답답한’ 역사로만 인식되어 있습니다만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역사에 대해서 그렇게 답답하고 맥(脈)없는 역사가 아니라 웅대한 고대사를 가진 역사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잘못 알게 되었을까요?우선 가까운 원인으로서는 국사학자나 역사 교육자들이 잘못 가르쳤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기는 그분들도 그렇게 밖에 몰랐으니까 아는 대로 가르친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한민족에게 끼친 외국의 해독(害毒), 곧 중독(中毒)·왜독(倭毒)·양독(洋毒)의 삼독(三毒)의 영향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통일신라 이후부터 서서히 유학(儒學)이 확산됨에 따라 사대주의가 싹트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조선에 와서는 중국을 높이고 대국으로 섬기면서 조공이나 바치고 옛부터 중국에 예속되어 반도 안에서 소중화(小中華)로 만족하고 살아왔으며. 그러다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부터는 거꾸로 한국은 일본문화의 한 지류(支流)이며, 그 혜택을 받고 성장해 온 것」처럼 강제로 왜식(倭式)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사실 조선(朝鮮) 518년과 일제 35년, 계 553년 간은 조국이 없던 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이번에는 서양문물에 급속히 감염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한국인들은 중독(中毒)·왜독(倭毒)·양독(洋毒)에 차례로 중독되어 제 정신을 못차리고 정신병환자처럼 방황해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간이 얼마나 되었는가하면 대진국(발해)이 망한뒤 1천년이 됩니다. 이 천 년간의 역사로 말미암아 세계적으로 한국이란 이미지는 ‘중국이나 일본의 예속 국가이며, 언어나 문화도 그들과 대동소이한 한문권(漢文圈)문화이다’라는 정도로만 알려져 왔던 것입니다. 즉 유사이래 수천 년 동안 광대한 동북아시아 대륙의 초원과 원시림과 벌판에서 양 치고, 말 타고 사냥하며, 정착하여 농경문화의 꽃을 피워 아시아 천지를 지배하면서 인류문명의 기원이 되었던 웅대한 기상의 한 농경유목민족이, 따뜻한 대륙의 한 구석(狗席:개자리)으로 안주(安住)하면서부터 1000년이란 세월이 세계사의 뒷골목으로 숨어버린 것입니다.

이렇듯 그 동안 존화사대사관(尊華事大史觀)이나 일제식민사관, 그리고 천박한 서양의 물질만능, 백인 우월주의 역사관과 종교관이 차례대로 밀물처럼 이 땅위에 밀려들어와서 판을 치고 있었으나, 여러 민족 사학자들의 피눈물나는 노력과 국민들의 자각으로 인해 민족사관의 명맥(命脈)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 본격적으로 우리 것을 찾자는 운동이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은 사상적·문화적으로 불풍(佛風)·유풍(儒風)·왜풍(倭風)·양풍(洋風)등 계속적으로 외국의 태풍이 불어와서 휩쓸리는 나무와 같이 바람 잘 날이 없었기 때문에 뿌리 채 뽑힐 뻔한 위기도 몇 번 있었으나, 결국은 우리 자신의 한사상·한문화가 물결치는 국풍(國風)이 되어 르네상스기(期)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독과 삼풍(三風:유풍·왜풍·양풍:불풍은 한사상으로 흡수, 동화하였음)의 결과로 우리나라는 현재 삼람(三覽)의 장(場)이 되어 있습니다. 그 예로 첫째 국제 종교 백화점이요, 둘째 국제 사상 박람장(博覽場)이요, 세째 국제 문화 전시장(展示場)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삼람의 장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취사 선택, 종합하여 새로운 우리 것을 만들 때가 된 것입니다. 우리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나라 인문학(人文學)에 종사하는 학자들과 종교계 인사들은 물론, 전 국민이 하루 빨리 깊이 반성하고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각해서 해야 할 일 중 첫째는, 일부 역사가들은 우리 나라 책들과 중국 책들을 폭넓게, 또는 깊이 연구해야지, 우리 나라 역사를 망치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낸 일본 책들만 보고 우리 역사를 쓰는 반역적이고 망국적인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철학자들은 외국 철학을 연구하는 대신 우리 민족의 고유한 종교와 철학과 도의 및 윤리를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경우를 보면, 대부분 남의 것만을 연구하고 가르치니, 이것을 배우는 후배들과 자손들은 배우면 배울수록 사대사상(양풍·왜풍 등)만 짙어져서 결국은 국제적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선생께서 ‘정신없는 역사는 정신없는 민족을 만든다. 사필(史筆)이 강해야 나라가 흥한다’고 말씀 하셨듯이, 역사 교육자들과 철학자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습니다. 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외래사상이 좋은 약이 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편이 될 것입니다.

둘째로 오늘날과 같은 다종교(多宗敎)사회에서의 모든 종교와 종교인들은 자기 종교가 민족과 조국의 품속과 그 밑에 있는 것이지 결코 민족과 조국보다 위에 있거나 그 밖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일부 종교인들 중에는 여러 외래종교의 창시조나 그 나라의 역사와 풍속들은 훤히 알고 따르고 받들면서, 제나라 제 민족의 창시조와 역사는 모르고 심지어 거부(拒否)하는 태도까지 취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자기 종교 이외의 타 종교는 강경하게 배척하려 함은 물론이거니와 제 종교 안에서도 파벌로 갈라져 화합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 민족 자신을 위하여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종교를 민족화 시켜야지 민족을 종교화 시키려하면 종교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북아일랜드·인도·중동같이 말입니다.

어떤 종교든 아집(我執)·독선(獨善)·배타(排他)등으로부터 벗어나서 역사의식·민족주체의식·세계의식·우주의식으로 화합 포용하여 사회구원, 민족구원에 앞장서야 할 것이며 특히 우리의 민족적 과제인 민족통합문제에 있어서도 각 종교단체들이 적극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하여야 하며 남북 대치상태를 극복하여 통일을 이룩하는데 힘이 되려면, 각 종교 자체의 내부단합은 물론, 민족적 심성에 화합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개인 영혼구원, 기복신앙(祈福信仰)이나 백인 우월주의 종교관 만으로는 국민들에게 큰 동기(動機 : Moment)를 제공할 수가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원효(元曉)선사의 파계(破戒)나 동학농민혁명 때와 같은 민중적 호응(呼應)을 유발할 만큼 신학적 대전기(神學的大轉機)의 필요성은 못 느끼시는지요? 모든 종교는 피상적 토착화가 아니라 실질적 토착화·민족화·구심화(球心化)가 되어야 할 것이며, 오늘날 남미의 해방신학을 단순히 부정만 하지 말고, 타산지석으로 삼아 그 지역적·역사적·시대적 배경을 재고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삼람의 장에서 새로운 긍정적 전기(轉機)를 맞을 수 있을 때, 우리 민족은 물론 온 세계 인류의 장래가 환하게 밝아올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통일에는 통일 이상의 것이 있고, 우리 민족이 통일되면 온 인류 공동의 문제 해결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전기를 살리지 못하고 민족적 용트림에 성공치 못할 경우, 우리는 3독에서 바로 세 가지 망조(亡兆)인 3망(三亡)으로 굴러 떨어질 것인 바, 바로 종교 식민지, 국제 사상 오염장(汚染場), 국제문화 쓰레기장 구실 밖에는 못하게 되어, 끝내 제 몸에 맞게 지어 놓은 제 옷은 벗어 던지고 영영 남이 고쳐 지어 주는 옷이나 얻어 입는 식민지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황당무계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모든 문명의 뿌리는 우리 한민족입니다. 지금 이 모든것이 나들이를 하고 변질이 되어 제 집으로 돌아온 것 뿐입니다. ‘한’역사, ‘한’사상은 인류 문명의 뿌리이자 반석이었으며, 이제 다시 방황하는 인류를 인도하는 빛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제집을 찾아온 외국문명의 태풍에 몸살내지 말고 묻혀있던 본래대로의 역사와 사상을 파헤쳐서 우리의 것을 소중히 알고 빛내며 우리 조상을 공경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 오늘의 한국은 새 역사를 창조할 때입니다. 새 역사를 창조하자면 지난 과거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한국의 재발견은 본래의 한국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崔仁의 《한국의 재발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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