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에 웅비한 고조선-일제 식민사관의 희생물

고조선 왕조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요즘 논란이 많이 되고 있기 때문에 들어 본적이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여기 《자유지(自由誌)》1981년 12월호에 실린 박창암 장군(예비역·월간 자유사 대표)의 권두 논설을 옮깁니다. 일제 식민사관이 무엇인가를 알게되면, 일제가 왜 단군조선과 삼국의 웅비상을 담은 우리의 상고사(上古史)를 한사코 없애버리려고 하였는지 알게 될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상고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고 한국을 일제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편리하도록 반복 교육함으로써 한국 민족이 일제의 침략정책에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며 한민족의 자주적인 민족성을 완전 거세하여 식민지 백성으로 길들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 국민에게는 일본의 한국지배를 정당화시킴으로써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도리어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획책한 것이 바로 식민사관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제의 식민사관을 성립시키는데는 일정한 구성요건이 꼭 필요한데, 바로 이 구성요건이 제거되지 않고는 제아무리 그 껍데기를 다른 이름으로, 예컨대 ‘민족사관’이라고 바꿔 붙인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제의 식민사관을 반복하는 반민족적인 교과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성요건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상고사(上古史)와 국조(國祖)의 부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이 중국 대륙과 만주를 지배했던 상고시대의 4천년의 역사를 아예 쑥 빼버리고, 국조인 단군과 그 웃대의 한웅시대와 한임(桓因)시대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 역사의 시작을 위만 조선과 거짓으로 꾸며낸 한사군에 맞춤으로써 고조선의 건국이념도, 국조도 없애 버릴 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소위 한사군(漢四郡), 즉 한(漢)의 식민지였던 것처럼 꾸며 이것을 한국에 대한 외국 세력의 식민지 선례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후대에 역시 거짓으로 꾸며낸 일본 통치부(임나일본)가 우리나라 남부에 상륙했던 것처럼 역사를 날조하는 가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한민족은 스스로 나라를 세운 일도 고유 문화도 없었고, 우리나라는 주인없는 미개지였던 것처럼 조작하여 침략자의 한국강점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동양사의 주체(主體)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현재의 한반도 안으로만 압축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발해와 신라가 양립했던 우리 민족의 남북조 시대를 대동강 이남으로만 줄여 버리고, 대륙에서 흥망했던 고구려와 대진(大震)의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사에서 아예 없애 버리며 고구려와 대진의 뒤를 이은 대금·대청을 말갈 또는 여진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민족의 한갈래가 아닌 것처럼 꾸며내어 대금·대청과 그 국가적 활동을 우리민족의 활동사에서 제거하려는 논리로, 우리 민족사가 대륙에 기반을 둔 강대국이 아닌 대동강 이남 만의 반도 내의 소국의 역사로 만들려는 음모입니다.

세째로 우리민족은 오늘날까지 제대로 독립을 해본 적이 없는, 주인도 없고 뿌리도 없는 유랑민(이병도의 戰國流移民說)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분열을 일삼는 망국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역사를 날조했습니다. 예컨대 삼국사는 민족분열·동족상잔의 역사이고, 고려사는 기강없는 음탕한 역사이며, 조선사는 탐관오리·사색당쟁으로만 일관한 망국의 역사로 만들어 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 뿌리도, 임자도 없었던 근본부터가 한(漢)의 식민지였던 나라, 둘째로 반도안에 움츠린 채 기를 못 폈던 약소국, 셋째로 예로부터 피정복민인 무능·부패·분열·민족상잔의 망국 근성을 가진 민족으로서 스스로는 발전할 수 있는 추진력이 없는 정체된 사회속에서 살아온 미개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독립할 능력도 없는 한갖 고기덩어리가 열강의 침략 야욕만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평화를 파괴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동양의 평화를 유지할 사명을 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거나 식민지로 통치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일제의 식민사관의 골자입니다.

이처럼 역사를 날조하기 위하여 일제는 우리나라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역사책을 전부 약탈해 갔습니다. 이러한 한국사 날조의 음모는 일제의 명치유신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제는 명치유신이래 그들의 국시였던 대륙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안으로는 일본역사를 한국지사(韓國支史)가 아닌 자생 민족사로 날조하여 소위 황국사관을 만들어냈고, 밖으로는 한국역사를 오히려 일본지사(日本支史)처럼 날조했습니다.

조선사 탄생의 비극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은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사전에 면밀하게 준비되었는데, 그 첫 단계는 역사 정복(식민사관 날조), 둘째로 종교 정복(민족종교와 그밖에 여러 종교를 탄압하고 신사참배 강요), 셋째로 국어와 한글 정복(일어를 국어로 강제로 사용케 하고 한글을 못쓰게 함), 넷째로 정통 정복(창씨 개명)을 총독부의 정책으로 강행했습니다. 대략 위와 같은 식민 통치 각본의 원전이 바로 다름 아닌 식민사관으로 위조된 조선사(朝鮮史)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국사 교과서의 표지 이름이나 그림이나 삽화가 제아무리 우리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해도, 그 내용이 대체로 위에서 말한 식민사관 내용을 탈피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제 식민사관의 답습, 또는 복창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가짜 조선사는 모두 6편으로 되어 있는데 신라 통일이전을 제1편으로 하고 신라통일시대를 제2편, 고려시대를 제3편, 조선시대를 제4, 5편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짜 역사의 역점이 안팎으로 교묘하게 짜여져 있다는데 우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즉 겉보기에는 근세와 근대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조선 왕조사에 역점을 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반도 속에 움츠려 기를 못 폈던 반도속방사관(半島屬邦史觀)을 주입시키려는 음모입니다. 또한 신라 통일 이전을 제1편으로 설정한 것은 고조선의 대륙 지배역사가 우리 민족정신을 자각시키는 원천이 될 것이 두려워, 그것을 깡그리 이름도, 내용도 말소해 버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가짜 조선사의 핵심이 되는 제 1편 신라통일이전(즉 고조선시대), 제 2편 신라통일시대, 제 3편 고려시대와 같은, 우리 민족이 그 능력과 재질을 과시하여 크게 웅비했던 시대를 날조하는 작업에는, 일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비록 일본의 요인이라해도 감히 근처에 얼씬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묘하게도 한국 사람인 이병도씨가 무슨 연고가 있었는지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수회 수사관보로서 이러한 고대사 개편의 역사 날조작업의 주역으로 깊숙이 관여했던 사실은 우리나라 사학계가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수수께끼입니다.

오늘날 사학계의 현역 교수들의 대부분이 그의 문하생들로 단단한 인맥을 이루고 있으며(講壇學派), 그 정예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일제의 식민사관을 철저하게 답습하여 국사오도(國史誤導)와 민족정기 거세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 사학도들이 설자리는 박은식·신채호·정인보·최남선과 같은 독립운동가 이거나 이에 준하는 독립지사를 빼놓고는 오직 일제의 식민사관의 포교사(布敎師)의 지위 밖에는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더구나 광복 후에까지도 겉치레로만 자주(自主), 자유(自由)였지, 기실 진정한 국사학도들이 공부할 우리의 국사의 진본(眞本)은 이미 자취를 감춘지 오랜 황무지와 다름없었습니다. 이러한 무대에서 이병도씨의 진두지휘하에서 지금 사학자들이 교육받고 성장하였다면, 이 사람들을 재교육시켜 식민사관으로 인한 왜독을 철저히 제거하는 작업이 최 선결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국사 이외의 다른 전문 분야에서는 공인 교수, 박사를 그 방면의 전문가로 꼽는 것이 상식입니다만, 그러나 국사학계에서만은 기실 전문가가 비전문가요, 재야의 세칭 비전문가가 오히려 실제 전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이 사이비 전문가들, 식민사관에 완전 무결하게 중독된 사람들은 하루 빨리 재교육되어 진정한 민족사학자로 재육성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상 그분의 논설문 취지). 독일의 레오폴드 폰 랑케(Leopold Von Lanke:1795-1886)라는 사학자의 실증사학을 역이용하거나 그 자의 ‘역사를 관통하여 흐르는 정신이란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된 시대적 배경도 모르고 ‘실증사학’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얼빠진 얼간이(얼姦-일제로부터 얼을 강간 당한자) 사학자나 교수는, 이제 민족적 양심으로 회개(悔改)하고 강단(講壇)에 서는 것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군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로 애칭 석두장군이라 하면 모르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분은 훌륭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국사학계에서는 진짜 석두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 식민 사학자들이 신주처럼 모시는 「Lanke사학」이란, 폭력적 역사이론, 구사학·문헌고증주의를 골자로 하고 있으며 이는 역사사건의 외양 즉 표층만을 강조하는 주장으로서 시대적 배경에 의하여 영향받은 학설이며, 그렇기 때문에 식민사학자들은 서양사관에도 중독된 자들임.

 ■ 이 땅에는 이제 한사상이 눈을 뜨고, 한무리가 주둔한다. 고고학·역사학 등 젊은 학자들은 구태의연한 학설의 구각(舊殼)을 벗어 던지고, 追從만 하지 말고 박차고 나서서 폭넓은 연구자세를 가져야 할 때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 역사용어부터가 일본인들이 만든 것을 식민사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쓰던 것으로써 고칠 것이 참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한일합방’이 아니고 ‘경술국권 침탈’, ‘을사보호조약’이 아니고 ‘을사외교권피탈’, ‘친일파’가 아니라 ‘부왜배(附倭輩), ‘부왜역적’, ‘의병운동’을 ‘의병전쟁’, ‘독립운동’을 ‘광복의거’ 또는 ‘광복전쟁(당시는 독립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고유명사가 아니면 일반 역사용어는 광복으로 써야 할 것임)등 무려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역사용어 뿐만 아니라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에서부터 왜색, 양색을 지워 나가, 민족 순수언어로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요즘 국사 교과서 개정을 위해서 국사교육심의회가 모였습니다. 기대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광복후 이승만 정권때부터 정치·경제·군사 등 몇 가지 분야에서는 그래도 그들이 6.25와 경제부흥을 통하여 국가재건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으나, 오직 국사학계에서만은 아직도 반성하지 못하고 여전히 국민들에 게 해독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 마당에 아직도 재교육이 안 되었다던가 진정한 정신개혁을 하지 못한 국사학계인사들은 선별 조치하여 강단에서 추방해야 된다고 봅니다. 칼들고 사람죽이는 자만 살인자가 아닙니다. 이들이야말로 더 큰 민족정신 살인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없다고 해서 국사학계가 쓰러지지 않습니다. 백해무익한 존재들입니다. 어떻게 그들에게 우리 자제들의 교육을 맡기고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는 어떤 작자는 그릇된 역사를 영어로 번역하여 외국 사람에게 알리는가 하면, 근래에 일본 역사학자들이 만든 한국사나, 일본 학자들 또는 우리나라 식민 사학자들의 도움으로 만든 서양학자들이 써낸 한국사가 무책임한 국내 일부 번역가들에 의하여 (그들로부터 자금지원을 받는다 함)비판없이 번역되어져 국내 서점가에서 버젓이 판매되고 있으니 참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사이비 식민 사학자들은 아는 것이 없으니 옛날 상전으로부터 배운것이나 재탕해서 울궈먹고 사는 식충이나 장사꾼에 불과하지, 어떻게 학자나 교수라 하겠습니까. 우리는 아직 겉으로만 해방되었지 내면적으로는, 곧 역사나 사상면에서는 아직도 식민지 노예상태에서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제야 조금씩 이러한 것을 깨닫기 시작은 하였지요. 이제 우리는 박사도 국내에서 나온 박사만 진짜 한국박사로 쳐줄 세상이 와야 합니다. 이제는 일제 미제로부터 진짜 해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민주주의도 미제 민주주의(American Democracy)가 아니고 한국 민주주의(Hanism, Koreacracy) 가 되어야 합니다. 일제 식민사관을 설명하다가 옆길로 빠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고조선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이미 오래 전에 단국대학에 계시는 윤내현(尹乃鉉)교수께서 《民族의 고향 古朝鮮을 가다》라는 제목으로 괄목할만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전문(全文)을 전재(轉載)를 할 수 없어 내용만을 기초로 하고 요약함과 동시에 한단고기등 기타 자료에 의한 본인의 역사 상식을 첨부해서 진행하겠습니다.

고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원래 그냥 조선(朝鮮)입니다. 옛날에 있었던 조선이라 해서 고(단군)조선입니다. 진조구변국도(震朝九變局圖)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설명하려면 본조(本朝)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데, 조선이라는 국호를 다시쓰는 ‘조선’, 곧 ‘근세조선’, 일본이 얕잡아 부른 이름에 우리가 숙달되어 버린 ‘이씨조선’도 조선입니다. 이 양 조선을 구분하기 위해서 앞에 접두어를 붙이는 것입니다. 고조선의 강역(疆域)은 윤교수에 의하면, 북경근처의 난하(鸞河)로부터 청천강, 동해, 쇠머리(牛首里) 강을 연한 중국 북부 일부, 만주, 백두산 일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조선 2천년간의 고정 강역을 한 마디로 한정해서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지만, 대부분의 기간을 통하여 기본 강역은 이 지역이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전세(戰世)와 시세(時勢)에 따라서 국토의 장축(長縮)이 많았는데 상기 지역이 고조선의 안 마당이였다면, 요수 곧 난하의 서쪽, 역사상 통상 지명이었던 북평(北坪)과 낙랑(樂浪)평야 지역을 비롯한 화북·화남·산동성·산서성·찰합이성 일대는 바깥 마당이였으며, 멀리는 상해의 강소성, 동정호의 호남성, 감숙성, 영하성 까지가 고조선의 싸움터요, 대문 밖 놀이터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서쪽은 난하 서쪽 북평과 낙랑, 북쪽은 흑룡강을 걸터앉고, 동쪽은 큰 바다며, 남쪽은 문경새재까지가 고조선의 준(準)강역이였습니다. 즉 군사용어로 영향지역은 기본 강역을 포함한 준 강역이었으며, 싸움터이던 양자강 일대와 감숙성, 영하성 내부 및 일본 구주지역은 관련 지역이였던 것입니다.〔영향지역 : 아군의 영향 아래 곧 통치권 안(內)에 있는 지역. 관련지역 : 아군의 전투력이 미치는 전진, 철퇴의 작전지역〕.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의하면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는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셨다. 또는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하셨다’고 기록하여 도읍이 아사달과 평양 두 가지로 나옵니다. 설명을 하려면 한이 없기 때문에 한마디로 아사달과 평양은 동일 장소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써 그 위치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고, 만주 중부의 한 지역으로서 하루삔의 완달산 일대와 지금의 심양부근으로 비정 하고 있습니다.

아사달이라는 말은 앞에서 설명 드렸습니다만, 아사달-아시땅(처음 땅)-아시터-애터-애또(일본 동경지역)로 변화되며, 일본 ‘에또’의 명칭이 우리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앳되다’라는 우리말도 있습니다. ‘Asia’는 ‘아씨리아’말-해뜸(日出)을 의미하는 Aszu, 또는 우리말 ‘아시(아시갈이, 아시매기,아시방아, 아시빠시)’에서 유래된 처음 땅, 해뜨는 땅 동양(東洋)이요, 참고로 “Europe’은 역시 ‘아씨리아’말로-해짐(日沒)을 뜻하는 에렙(Ereb)에서 유래된 해지는 땅 서양(西洋)이라고 합니다.

■ 일본의 전자제품 제조회사 Hitachi(日立)←해돋이.

평양이라는 말은 벌내·발내로서 옛날에는 고유명사가 아니고 검벌(神市)·서라벌·달구벌(大邱)같은 벌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였습니다. 임금님이 자리를 정할 만한 넓직한 벌(평야·들)이 바로 평양이였던 것입니다. 단군 한배검께서는, 배달한웅천황(倍達桓雄天皇)께서 개천 하셨던 한밝산 기슭 검벌(神市)에다 나라를 세우셨는데 사람들이 ‘한배검성(王儉城:왕검성)’, ‘평양’, ‘아사달’이라 한것입니다.
곧 넓직한(평양) 처음땅(아사달)에서 임금님이 집을 짓고 성터를 잡으신 것입니다(왕검성). 우리가 서울이다, 한양이다, 한성이다 했던 것과 다를 것이 없겠습니다. 동일지방이지만 글쓰는 사람이나 부르는 사람의 의향에 따라서 약간의 뜻과 뉘앙스가 다를 뿐이지요. 하여튼 단군조선으로부터 고구려 동천왕 21년, 현재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AD 247 : 동천왕이 옮긴 수도가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는 설도 있음) 2580년 동안 남북 만주, 북 중국의 넓은 땅을 다스리면서 수도를 여러 곳으로 옮겼습니다. 따라서 서울을 표시하는 왕검성과 평양이 이곳저곳에 있는데, 난하(옛 요하)의 좌우쪽, 대능하(大陵河), 현재의 요하(遼河:해성←검성←왕검성), 요동반도의 어이하(於泥河), 대동강 등의 지역에 있는 것입니다. 고조선은 처음에 만주중부 평양성에 서울을 정했다가, 세력 확장기에는 서진을 위하여 옛 요동(대능하 서쪽)으로 (백악산 아사달), 기자 집단이 망명해 왔을 때에는 그들에게 땅을 봉해주고 봉지(封地)와 너무 가까우므로 대능하 유역으로(BC 221경, 장당경), 위만 정권이 기자(箕子, 奇子)의 번조선(番朝鮮)을 노략질해서 세력이 마주 칠때에는(BC108년) 원래의 아사달로 4번 천도를 한 것입니다. 고조선의 도읍이 현 평양이 아니고 만주지역에서 여러 번 옮겼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 고조선의 천도현황(遷都實況)은 한단고기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에 의하면 다음과 같음.
송화강 아사달 시대 : 초대∼21세 소태(蘇台) BC 2333∼BC 1286까지(1048년간))
백악산 아사달 시대 : 22세 색불루(索弗婁)∼43세 물리(勿里) BC 1285∼BC 425까지(860년간)
장당경 시대 : 44세 구물(丘勿)∼47세 고열가(古列加) BC 425∼BC 238까지(188년간)

우리가 평양과 왕검성의 시대에 따른 위치 변동을 잘 몰랐듯이, 요수(遼水·遼河)나 패수(浿水), 살수(薩水)의 위치도 잘 몰랐기 때문에 우리 역사를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 변경사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요하의 시대적 위치 변동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오래 전 주나라(西周) 때에는 황하의 중류를 요하(遼河)라 했으며, 따라서 태행산맥(太行山脈)을 중심으로 동쪽은 요동(遼東), 서쪽은 요서(遼西)라 했습니다. 그 다음 요하가 이 난하(鸞河)로서 그 동쪽평야와 산지 일대가 요동이요, 북평(北平:오늘의 북경)·낙랑으로 불리던 이 지역이 요서 땅이었습니다. 이 요하의 동쪽 가까운 곳에 산해관(山海關)이 있는데 여기서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시작됩니다.

■ 만리장성은 진시황 당대에 다 쌓은 것이 아니고, 연(燕:BC 550년경)나라 때부터 전국시대를 이어 여러 나라들이 부분적으로 쌓았던 것을 진시황이 연결한데 지나지 않으며, 명나라 때도 산해관 지역을 축조하였음. 말이 넘지 못할 정도로 쌓으므로서 북방기마민족의 기마활동을 제한하는 것이 1차 목적이었음.

다시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을 침략한 뒤로는 대능하를 요하라 하였고, 또 고구려가 망한 뒤로는 구려하(句麗河)가 현재의 요하로 되었습니다만, 거란(契丹) 곧 요(遼)나라가 일어나서 (AD 907)발해를 멸망시킨 후부터 오늘의 이 요하로 굳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요하가 여러 개가 있었는데, 한마디로 요수(遼水)라는 강명(江名)은 중국의 동북쪽 국경을 이루는 강에 대한 대명사입니다. 중국인들이 우리 강토를 줄이고 역사를 흐리게 하기 위하여, 고조선의 땅이던 북평(北京)에 있던 낙랑과 요하와 패수를 점점 동쪽으로 옮겨와 만주의 요하와 대동강까지 왔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패수도 여러 고기(古記)에 의하면 수 없이 많은데, 북경 동북쪽의 백강(白江)으로부터, 난하·대능하·요하·어이하(요동반도 해성현)·압록강·대동강·예성강·임진강 등입니다. 살수도 청천강만이 살수가 아니고 고기(古記)에는 여러 군데가 나옵니다.
이와 같이 요수·패수의 위치가 달라지는 대로 왕검성과 평양과 요동의 위치도 달라졌던 것입니다.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위만정권의 도읍도 지금의 평양이 아니고 북경 근처 험독성이 왕검성이라고 증언되고 있습니다.

단군조선의 통치제도
지금까지는 단군조선의 강역과 도읍에 대해서 장황하게 알아 보았습니다. 이제는 통치제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단군왕검께서는 조선을 세우신 후 삼신일체(三神一體) ‘한’사상에 따라서 나라를 세 임금, 곧 삼한(三汗→三韓)으로 나누어 분봉(分封)통치하였습니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신 또는 진 임금, 곧 진한(辰韓)으로, 동 아리수, 곧 압록강 이남 반도일대를 마한〔馬韓, 말한 또는 막한(莫韓)〕으로, 서부 만주와 동남부 몽고 및 서토(西土), 곧 중국 일대를 번한〔番韓 또는 변한(弁韓)〕등 세 임금으로 나누어 거대한 지역을 간접 통치를 한 것입니다.

■ 각 한(韓) 밑에 추방사회(酋邦社會) 군장(君長)을 통해 지배 : 부여·옥저·예·맥·낙랑·현도·진번·임둔·시라·고리(고구려)…조선등, 이 가운데 조선이 가장 강력한 추방 국가였음

그리하여 세임금, 곧 삼한이 생겼으며 단제(檀帝:檀君)께서는 직접 진한(辰汗→辰韓)의 임금이 되어서 번한과 말한 두 임금을 부왕(副王)으로 두고 다스렸습니다. 그렇게 되다가 1000년후에 22대 색불루 단군시에(BC 1280년경) 번한(番汗→番韓)으로 서우여(徐于餘:號 奇)를 분봉할 즈음 제도를 고쳐서 아예 각기 땅 이름을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부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통치권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번한 임금들의 땅인 번조선이 강성할 때에는 그 영토가 양자강 일대로부터 감숙성, 영하성, 산해관까지 였으며, 전세가 쇠약했을때에는 패수(백강 또는 난하)로부터 서부 만주까지 줄어들 때도 있었습니다. 이 삼한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나중에 우리나라 중·남부에 삼한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자(箕子, 奇子)라는 말이 나온 것은, 주(周)나라에 의하여 은(殷)나라(東夷族의 나라였음)가 망하자 은(殷)왕실의 후손 중에 한 소집단이 하남성으로부터 북경지역으로 망명하였는데(BC 1300년경), 이 지역은 고조선의 서쪽 땅인 번한이 다스리는 땅이었습니다. 그 망명온 집단의 후손 중에 고조선 왕실로부터 기(箕 또는 奇)라는 지역의 자(子)라는 작위(爵位)를 받아 변경지역의 제후가 되어 ‘기자’라는 일반 호칭으로 불린 자가 있었는데, 그들 중에 기준(箕準:기자의 한사람)이라는 자가 바로 번조선의 마지막 왕입니다. 이 때가 진(秦)이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 경 입니다. 그도 은 왕실의 후손이므로 같은 동이족으로서 조선사람입니다.

한고조(前漢 高祖: 劉邦)가 사망한 기원전 196년에 위만(衛滿)이라는 사기꾼이, 또 망명을 와서 번왕 준의 허가를 받고 살다가 이주민들과 토착민들을 규합하여 기준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자 정권이나 위만 정권의 성립은, 고조선 서부 변방의 한 사태로써 고조선의 멸망을 뜻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민족사는 고조선으로부터 기자조선-위만조선의 계통도 아니며, 위만조선이 우리 민족사의 대통(大統)을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또 고조선이 현 평양에 도읍하여 그 강역이 현재의 요하까지만 미친것도 아닙니다.

기자가 위만에게 정권을 탈취당하므로서 번조선이 와해되어 고조선의 서쪽 관경(管境)은 대능하까지 줄어들었습니다. 그후 BC 108년 전한의 공격으로 위만이 멸망하고 그 지역에 한의 4군이 설치되는 것으로 나옵니다만, 실제는 조선인에 의한 자치 4군으로써, 위만의 압제로부터 조선인 주권의 회복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내용은 그렇고 형식적으로는 이때 이미 고조선 왕실이 통치력을 상실하여, 예하 제후국들이 열국으로 분립할 때여서 한의 통치력이 미쳤던 것으로 보아야겠습니다. 한단고기에는, 이때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北夫餘)가 난하와 대능하일대 곧 당시의 요동일대를 장악하고 한구(漢寇)를 물리치는 기록이 무수히 나옵니다.

■ 《한단고기》의 〈태백일사/고구려국 본기〉에 의하면 산상제 원년(AD 197)에 낙랑, 현도를 공격, 한 4군이 멸망된 것으로 나옴

최리(崔理)의 낙랑국(樂浪國)과 낙랑군(樂浪郡)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한 4군의 위치가 현재까지 우리가 배운 대로 한반도 북부 평양일대와 황해도, 함경남도 일대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만주 대륙의 서쪽이라는 점입니다.(그 정확한 위치가 난하 동쪽, 서쪽, 난하 일대라고 하는 것은 세부적·지엽적 문제임).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로부터 시원스럽게 벗어나 버린 이상, 위만지역 4군현이라는 지엽적·일시적 사건은 거대한 우리 상고역사에서 그렇게 중시할 문제가 못됩니다.

그렇다면 평양 일대에 있다는 낙랑유적은 무엇이며,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전설에 나오는 낙랑국은 무엇인가?. 평양일대에 남아 있는 ‘낙랑’이라는 이름 때문에 의구심을 갖게 될 것이 당연합니다.

과거 국극단이나 학예회에서 공연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호동왕자의 나라인 고구려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낙랑공주의 나라인 낙랑국(樂浪國)에 대해서는 시원스런 해명을 듣지 못한 채 역사를 배워왔습니다.낙랑국은 서기 32년을 전후해서 지금의 평양자리에 실존했었습니다. 왕의 이름은 최리(崔理)였습니다. 이 시기는 낙랑군(樂浪郡)이, 지금의 평양지역에 존속되던 때로 배웠습니다. 이렇게 되면 평양에는 ‘낙랑국’이라는 독립국과 ‘낙랑군’이라는 식민지가 동시에 있었던 것이 됩니다. 4군현이 BC 108년에 설치되어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는 AD 313년까지 장장 421년간이나 우리나라 북부에 버티고 있었다면, 낙랑국이라는 독립국이 가능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사학계에서는 최리의 낙랑국에 대해서는 전연 언급을 하지 못하고 하나의 전설 정도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허위를 정당화 하다보니 내용이 사리(事理)에 맞지 않을 수밖에 없지요. 최리의 낙랑국은 AD 37년에 고구려로 통합됩니다만, 그보다 앞서 BC 169년에 낙랑 왕 최숭(崔崇)이 우리 북부여(北夫餘) 왕실(海城:요동반도 북부)에 곡식 300가마를 바친 기록이 나오고, 또 BC 195년에는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땅으로 옮긴 기록이 나옵니다.

이때가 위만이 기준을 축출하여(BC 194) 기준이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으로 도망갈 때이며, 우리 고조선의 말기, 북부여 때입니다. 시대상으로 볼 때 북중국의 낙랑지역이나 기준의 번조선(辰番? 이라는 小國으로 縮小)지역에 살던 최씨 일족이(그 지역에 낙랑국이라는 영주국이 있을 수 있음), 위만의 학정을 피하여 바다 건너 현재의 평양지역으로 옮겨와서 낙랑국의 유래가 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소위 한군현이 설치되기 87년 전입니다. 기준이 BC 194년에 쫓겨났는데, 최숭은 그보다 1년 전에 보물을 싣고 마한으로 갔다면 기준의 도피행각과도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낙랑이라는 고향의 이름을 따와서 살게 된 것이며, 그때 마한지역은 고조선 말기, 고구려의 태동기로서 통치력이 미약하던 시대적 상황이었던 만큼 평양지역에 낙랑(국)이라는 최씨들의 영지(領地)를 갖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 기준은 최숭과는 관련없이 남쪽 땅(금마군: 현 익산시)으로 가서 마한 왕이 된 기록도 있음. 어떻든 이 시기는 반도 북부에 있던 마한이 남쪽으로 이동되는 시기임. 盖馬, 乾馬, 金馬, 固馬, 阿莫, 古莫을 줄여서 馬자와 莫자만을 써서 마(말)한 또는 막한이라 한 것임. 金馬郡이 금일의 익산시에 속한다해서 기준의 到來地를 남쪽으로만 단정할 수 없음.

이렇게 하여 지금의 평양에 낙랑이라는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평양 일대에 있는 소위 낙랑군치라는 유적은, 조그마한 토성으로서 가로·세로 700m쯤 되는 좁은 지역이며, 이는 윤내현 교수의 고증대로 후한의 고구려 후방 교란을 위한 협공작전(양면작전)용 일시적 군사기지시설(AD 44. 196-220에 설치)일 수도 있으나, 고구려의 산상왕(AD 197-227, AD 197년에 낙랑, 현도 정벌)·미천왕(AD 300-331)·고국원왕(AD 331- 371)등 그 외 한창 세력을 떨칠 때의 한인(漢人)포로수용소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많으며〔황해도 대방이라는 토성도 마찬가지임:대방군에서 잡은 포로들을 수용, 그 당시는 포로를 잡으면 생시나 사후(死後)에도 전관예우(前官禮遇)를 하였음. 문명국에서는 지금도 마찬가지임〕, 역대 마한 임금들이 축조하였거나 또는 한인 포로들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을 것입니다.
그 외 출토되는 유물들은 일제 역사 날조자들의 고의적 날조품들이며, 일부는 한인 포로들의 유적인 것입니다(한의 일시적 군사시설이라면, 그들의 축조물이거나 유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 우리나라 북부의 한사군 설이 나온 이유는, 김부식이 사기의 기록을 잘못 이해했고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모화사관에 의해 기자와 위만의 위치를 잘못 고증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에 다시 일본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조작된 것입니다.

■ 식민사학자들은 낙랑군=낙랑국이라는 논리로 최리가 낙랑군 태수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인이 만든 동양사 사전을 그대로 모방한 『국사대사전』에 따른 구태의연한 논리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저작한 석학들이 그런 것도 구별 못하고 낙랑국왕 최리라고 했겠는가. 태백일사의 고구려국 본기에도 大武神烈帝 20년에 帝는 東압록 이남에 있는 樂浪國을 멸하였다고 분명히 樂浪郡이 아니라 樂浪國으로 나와 있음. 반도 내에 한사군이 있었다는 설의 허위성을 증명한 여러 민족사학자들의 상세한 고증이 많이 있으니 참고 바람.

■ 우리 역사에서 단군조선의 전 강역과 정통을 이어 받은 기자 조선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단군조선의 번한지역 가운데 ‘기’라는 땅에 ‘자’라는 작위를 받은 기자는 사실로서 존재했었다. 「기성(箕聖)이 들어와서 기자조선을 다스려 우리 문화를 깨우쳤다」는 것은 중근세 사대모화사상에서 유래된 것이다. 아마도 서부 변방인 번조선 지역의 기자가 이런 설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근거요, 빌미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 기자가 빌미가 된 것 외에도 우리 자체 내에서 기자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근거가 있다. 곧 한배검(王儉)의 뒤를 이은 아들(王儉子)의 이름을 줄여 검자(儉子)라고 했는데, ‘검자’의 音이 넘나들며 굴러 한자 번역이 ‘기자(箕子)’이므로 글자와 표현이 殷나라에서 온 ‘기자’와 우연 일치했을 뿐, 실제로는 전혀 다른 별개의 사람이다. 또 귀한 해아들(太陽의 子)이라는 뜻으로 옛말 ‘개아지’라 했는데, ‘      지→개아지→奇子 또는 箕子’로 적게 된 것이다. 또 ‘크치’(큰사람, 大王, 大公)가 奇子, 箕子로도 적게 되는바, 대야발의 《檀奇古史》에서 단기(檀奇)의 뜻은 檀君과 그 후손 奇子(한국고유의 기자이지, 은 기자가 아님)를 뜻함이다. 이와 같이 고유한 우리의 기자(奇子)를 사대모화(事大慕華) 선비들이 중국의 기자(箕子)로 오인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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