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학계의 풍토를 말한다

 

가. 민족사학 비판에 대한 역비판 

민족주의사관과 민족사관은 구별 되야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 가야 할 기본적인 문제가 있다.
첫째, 용어에 대한 인식차이이다. 용어에 대한 시와 비는 구태여 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의 민족사관을 잘못 이해하여 정의하고 있으니 거론치 않을 수가 없다.
식민주의사관이란 용어에 대응한 말로서 민족주의사관이란 용어를 써서 그대로 우리 민족사학에 적용하고 있는데, 식민주의사관이란 말은 경우에 따라서 무방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의 국제여건이나 지적수준을 감안할 때,’우리의 민족주의’를 보고 19세기적 민족주의라는 말이 타당한가 하는데 있다.
문화영토론이 거론되고 세계가 지구촌이 되어 가는 이 시점에 오늘날 이 땅에서 이른바 재야사학자들 이라 하여 그렇게 폐쇄되고 고집불통의 고루한 복고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인데, 민족주의자(Nationalist)로 단정하여 그 학풍을 민족주의사학이라 하는 것은 무리요, 억지다.
그들(재야사학자)의 심원한 목적과 방향을 사뭇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설사 단재 신채호 선생시대에는 민족주의사관으로 일관했다고 말할 수 있더라도 오늘날 그대로 용어를 답습하는 것보다는 이제는 주의라는 개념을 지워주어야겠다는 것이다.
일제가 이 땅을 식민지로 굳히기 위하여 식민지 정책에 따른 식민주의사관을 정립시켜 나갔는데, 그에 상응한 민족주의사관이란 말은 타당하겠지만 지금의 1년은 그전의 10년 100년과 같이 사회가 격변하는데 아직도 민족주의다 주의자다 하는 말 자체가 시대감각에 뒤떨어진 개념이다.
따라서 민족주의사학(또는 사관)이 아니고 민족사학(또는 사관)이어야 하고 나아가서는 한국사관이어야 하는 것이다.

    식민주의사관 〈 식민사관 〈 왜식사관
    민족주의사관 〈 민족사관 〈 한국사관
    사대주의사관 〈 사대사관 〈 중화사관, 지나사관

용어의 뜻이 다소 혼동될 여지가 있을지 모르나 그 어감은 명확히 다르다고 본다.
이른바 강단의 관학파 교수들께서 요즘 강조하고 있는 식민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은 일제하에서 잘못 정립된 그들(식민사학자)의 조선사관에 대한 비판일 따름이요. 근래의 소수 일본인들의 망언이나 왜곡된 일본교과서에 나타나는 경향, 구각에서 근본적으로 이탈하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결과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역사관 등을 포함해서 말할 때는 식민사관 왜식사관 또는 왜식식민사관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최근 현역 국사학계에서는 식민주의사관으로 통일하여 쓰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그 시대적 용어로 의미가 있는 것이요, 통시적개념은 못되는 것이다.
이것을 혼동하여 쓴다면 그들 스스로가 왜식식민사관에 빠져 있는 줄 인식치 못하기 때문에 나온 결과로 볼 수 있다. 왜식사관이야 식민사관이라 쓰던 식민주의사관이라 하던 우리에게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을지 모르지만 올바른 한국사관을 정립하기 위한 한민족의 민족사관을 민족주의사관이라고 단정하여 정의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가 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의 민족사학자를 국수주의자(Chauvinist)로 몰아붙일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강단학파의 논리대로라면 재야에는 전부 낡은 민족주의자들만 있지 현역 사학자들이 그들 자신을 일컬어 자부하고 있는 소위 객관적 합리적 과학주의 역사학을 하고 있는 민족사학자는 없다는 결론 밖에 안 된다. 주의라는 접미사를 한사코 붙이는 그 저의 속에 나타나고 있는 민족사학측에 대한 오만과 멸시, 한편으로는 자기들은 식민주의사학과는 관계없었다는 자기변호와 스스로 식민사관에 빠져 있는 줄 깨닫지 못하는 무지의 자세일 뿐이다.

둘째, 논쟁의 대상범위 즉 초점이 어긋난다. 한 사람은 동문(東問)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서답(西答)을 하고 있는 격이다. 그 서답을 가지고 동문한 사람을 업어치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국사학계에서 논하고 있는 「식민주의사관 비판」에 대해서 간단히 비판하고자 한다.

일제 식민주의사학자들이 주장한 반도적 성격론-지리적 결정론-타율성이론, 정체성이론, 일선동조론 등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고 당연한 비판이다. 우리 나름의 민족사는 그렇게 비판한 대로 바로 잡아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않는 지엽적 분석이 되고 있다. 민족사학(민족주의사학이 아님)측에서는 뿌리를 논하고 있는데 반하여 현역 사학측에서는(현역 강단사학자들도 민족 사학자로 자신하고 있으나 호칭상 그렇게 분류하기로 함) 중간둥치로부터 그 이후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뿌리와 밑둥치는 중간둥치와 그 가지와 잎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나 중간둥치로부터의 현상을 가지고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탄소동화작용 등 상하전체가 한 몸으로 다 건강해야 좋은 나무가 되겠지만 가지 하나가 상한다 해서 나무자체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썩은 가지는 잘라내고 쓸데없는 곁가지는 솎아내서 잘라내야 나무가 더 튼튼하고 바로 자라 재목이 된다. 또 꼭 필요하면 비틀어진 가지는 원둥치로부터 줄을 매달아 바로 잡아 주어야만 과일이 많이 열린다. 뿌리가 상하는 줄 모르고 윗 부분의 현상만을 가지고 나무 전체를 치료하려면 안될 것이다.

지리적 결정론의 함정과 모순을 인식치 못하고 스스로 그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걱정해 주는 그 노파심에는 경각심을 갖고 받아들여야겠으나 정작 반도적 성격론을 근원적으로 말살할 수 있는 실증과 이론적 근거가 있는데도 왜 그 이론을 그들의 체계적이고도 합리적 과학적 학문연구방식을 동원하여 구체화하고 뒷받침해 주는 데는 그렇게 소홀한가 하는 점이다. 소홀할 뿐 아니라 아예 외면하고 사갈시(蛇蝎視)하는 것이 첨단학문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들 강단학파가 취해야 할 학문적 태도란 말인가. 아니면 의욕이 부족하던가 한문실력 등 능력이 모자라면 솔직히 시인하고 수용하는 태세라도 취해야 하지 않을까. 땅덩어리의 역사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복지강대국이 우리가 지향하는 바라는 것은 구태여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오늘날 이 지구촌에서 영토전쟁을 위하여 역사학이 정치의 도구화되는 현상을 추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뿐더러 시대가 그것을 용납치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데 상고사를 들추어내어 한국사학을 바로 잡는다하여 그것이 곧 복고주의요, 역사전쟁 교과서전쟁 영토전쟁을 야기 시킬 것 아닌가하는 졸장부 같은 생각이야말로 학자적 태도라 할 수 없다. 진정한 민족사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너무나 이해가 부족한 것 같아서(그래서 민족주의사관이다. 국수주의다라고 공격하고 있지만) 답답하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 나무를 보는 데는 (서양적 분석을 하는데는) 명쾌한 이론이 목간통화(木間通火)같지만 숲을 보는 입체적 종합적 면에서는 미흡한 면이 없지 않다. 이에 본고는 서울대 서양사학과 양병우교수의 〈민족주의 사학의 제유형〉 과 한림대 사학과 길현모교수의 〈민족주의사학의 문제〉 두 논문을 고찰하여 두 논문이 일제하의 민족주의사관과 금일의 민족사관의 변모를 간과하였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는 민족국가의 형성 내지 출현형태에 따라 민족주의를 여러 유형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시이더(Th. Schieder)가 민족국가의 출현형태에 따라 그 내적 구조도 달라진다고하여 시도한 유형론적 고찰이 우리의 길잡이로서 매우 도움이 된다. 그는 프랑스처럼 내적혁명으로 민족국가가 성립한 경우와,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통일에 의한 경우, 그리고 피지배민족이 독립하는 경우의 세 유형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한국사시민강좌〉제1권 139쪽 〈민족주의사학의 제유형〉)

여기서는 민족주의에 대한 일반적 분류를 소개하는 대목이다. 이어서 논자는 각 유형의 특색을 설명하면서 자유를 내포하는 첫째 유형과는 정반대로 둘째 유형은 독일의 통일이라는 현실정치 앞에 자유가 배제됨으로써 코온( H.Kohn)의 말을 빌려 1860년대의 프로이센의 승리가 대부분의 독일인의 마음에 1918년과 1945년의 패배의 토대를 닦았다고 인용하고 계속하여 둘째 유형과 세째 유형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설명하였다. 프로이센은 독일영토의 2/3을 차지하고 있었던 유럽의 강국의 하나로서 독일의 통일을 위하여 자유를 희생했으나 세째 유형은 고유한 전통과 그 독자적 발전을 억누르는 외부의 침입자에 대항하여 자유와 독립을 되찾기 위한 광복운동을 함으로써, 저항적 내지 배타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자유지향적이었다고 했다.

다음에 지적되어야 할 것은 「민족사」가 민족주의시대의 역사서술방식이었다는 점이다. 민족의 영광은 과거의 영광에서 우러나며, 민족의 사명은 과거의 연장에서 찾아야 하였다.……이와 같이 민족사의 서술은 물결치는 민족주의의 소산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민족주의사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첫째 유형인 자유민족주의에 대응하는 것으로 프랑스의 미슐레(J.Michelet),둘째 유형에 대응하는 것으로 자유보다는 차라리 통일을 택한 「민족자유주의자」였던 드로이젠(J.G.Droysen),그리고 세째 유형으로서는 우리의 독립투사 단재 신채호의 사학들을 추려내어 이들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사학을 살피기로 한다. 그리고「민족자유주의」가 판을 치게 되었던 독일에서 자유민족주의의 기치를 외로이 지킨 게르비누스(G.G.Gervinus)도 대조를 위하여 아울러 고찰하기로 하는 것이다.(동 143쪽)

여기서는 각 유형의 대표적 민족주의사학자를 개관하였다. 민족사학이 민족주의시대의 소산임이 틀림없었으므로 지금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민족사학=민족주의사학의 동의어로 보고 비평을 전개해 나가기로 한다.

민족주의사학은 무엇보다도 실용적인 역사이려고 하였다. 게르비누스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 랑케가 그를 추도하는 글에서 지적하였듯이, 민족주의사학자들은 「학문이 모름지기 현실에 관여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역사를 썼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요샛말로 현실참여의 사학인 것이었다. 실상 민족주의사학자들은 학문적 활동 뿐 아니라 실제적 행동을 통해서도 그들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때문에 강단에서 쫓겨나는가 하면 국회에 나가 싸우기도 하고, 또 심지어 망명의 고초를 겪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역사는 그들에게 하나의 「정치적 과업」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역사를 한낱 정치적 수단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랑케가 앞서 언급한 게르비누스추도문에서 「영향을 미치려면 그것이 우선 학문이어야 한다」고 경계하고 있지만, 그들은 정치적 입장과 학문적 요구를 양립시키려고 애쓴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학문적 역사를 통하여 계도함으로써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 하였던 것이다.(동 143쪽)

현실과 유리된 역사는 없다
민족주의사학자의 현실참여 관념에 따른 학문적 객관성을 위협할 여지와 학문적 순수성과의 괴리상태에서 파생되는 문제를 나타내고 있는데, 필자의 비약인지는 몰라도 현재의 우리 민족사학계에 이것을 비유해서 말한 의도가 있다면 무리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도 국회 문공위 청문회까지 간 사실도 있지만 순수한 학문적 목적 외에 딴 의도가 있다고 보면 오산이 될 것이다. 또한 학문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은 학문자체의 생명이지만 역사학이라고 하여 현실에서 유리된 고고한 학문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성향에서 오늘날 서양사가 얼마나 백인위주로 되어 있는지 서양사를 전공한 사람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비록 역사학이라고 한들 현실에서 완전 유리된 사학은 사학이 아니라 사학(死學)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필자의 소견이지만 오늘날 민족사학자들의 종국적 목표. 다시 말하면 정치적 과업은 국사를 바로잡아 민족자긍심과 민족정신을 일깨워 홍익인간사상으로 나라를 통일하고 세게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는 고차원적 철학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도 19세기말 20세기초 독일민족사관과 비교되어 비판되어져야 할까. 이 논문자체가 단순히 민족주의사학에 대한 경종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의 민족사학에 대해서는 이 역시 동문서답의 결과가 되고 만 것이 아닌가 한다. 위 비평에 관계된 내용이 논문의 다음 인용문에서 계속된다.

무릇 정치적 입장이 학문적 역사와 원칙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역사가는 자기 나름의 입장에서 마음에 드는 주제를 고르고 바람직한 가설을 세울 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 가설이 실증되는, 다시 말해서 사료에 의한 검증이 이루어지는 날에는, 그것은 엄연한 사실로서 역사가가 그의 신념을 펴는데 유효한 수단이 될 것인즉, 그것을 실증하는 과정이야말로 그의 「정치적 과업」의 핵심을 이룬다고 하겠다. 그런데 바로 그 과정이 말썽거리인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가의 신념이 강할수록 부지중에 정당치 못한 방도로라도 바라는 결론에 도달하려고 하기 쉽기 때문이다. 여기에 민족주의사학의 위험이 깃 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험을 극복하는 것이 민족주의 사가(史家)의 학문적 과제인 것이다.
그러면 그 점에서 단재의 경우는 어떠하였는지를 보기로 하자. 그는 이미 살핀 바와 같이 역사의 학문적 자주성을 강조하고, 「사실을 그대로 적고 저작자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첨부 혹 변개 하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객관적 사실에 충실할 것을 역설하였으나, 그 사실을 확립하기 위한 사료의 비판이나 해석에 있어서 과연 불편 부당하였던 것일까. 「역사 이외의 무슨 딴 목적」이 부지 중에나마 작용하지 않았을까. 유감스럽게도 단재 역시 그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는 「삼국사기」나 중국사서에 대해서 가차없는 비판을 가한 것과는 달리 이른바 고기(古記)·비록(秘綠)·야사(野史)등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단기고사(壇奇古史)가 진본임을 의심치 않았을 뿐더러……,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는데 있어서 그가 보인 직재적이고 독단적이라고 할 처사도 그와 궤를 같이하는 일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이 민족주의사가들이 역사서술을 「정치적 과업」으로 삼고 그것으로 동포를 각성시키고 고무하려 한데서 자칫 학문적 절차를 어기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민족의 위대했던 과거로 눈을 돌린 것이었다. 그 눈은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에서처럼 민족고유의 것을 찾아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려는 국수주의적 경향을 띠기까지 하였다.
그와는 달리 미슐레나 게르비누스나 드로이젠의 눈은 현재 내지 미래를 향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동 145~146족)

객관적이려고 노력은 하고 있으나 소망하는 결론에 도달하려다 보니 가끔 비합리적 과정이 따른다는 것은 시인할 수 있는 사실이 되겠으나 그것은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사실이요, 그렇다고 단재의 직재적 독단적 국수주의적인 면보다는 합리적 거시적 사관을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논자는 「이른바 고기·비록·야사등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운운하고 있는데 부당한 편파적 속단이 아닌지 두고 볼 일이다. 한단고기·규원사화·단기고사등 선가(仙家)사서류에 대한 완벽한 평가를 하려면 통일후 만주,북중국,몽고,시베리아,중앙아시아 등지를 두루 섭렵할 수 있을 때이겠으나, 그때가지 기다리기 전에 기타 사서류, 고고학, 민족신앙등 여러 실증과 반증에 의하여 사실로서 인정되고 있는 부분부터 실사로 수용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는 더 나아가서 서양사학자들은 오히려 현실적이었고 미래지향적이었다고 치켜 세우고는 그 대신 은근히 단재를 고루하게 평가하는데 이것은 민족주의운동의 상이한 형태에서 유래되는 결과를 무시한 그래서 실상을 잘 못 본 모순된 논리이거니와 이런데서 자비증세(自卑症勢)를 엿보는 것 같아서 심히 불쾌하다. 그래 놓고서는

그러나 드로이젠이나 단재의 경우는 달랐다. 자유보다 통일을 앞세운 독일의 이른바 민족자유주의자들은 우선 그 목적을 외교적. 군사적수단에 의하여 달성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권력정치를 지지하고 전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주적 통일의 테두리를 벗어나 팽창주의적 경향을 띠기까지 하였다.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서 그들은 독일의 국경을 최대한으로 넓히려고 다른 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까지 그 속에 들여 놓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프로이센학파의 막동이인 트라이치케(H.V.Treitschke)는 제국주의 정책을 표방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한편 일본의 침략을 목도한 단재는 제국주의 시대의 국제사회를 약육강식의 투쟁장으로 보았다. 그래서 앞서 지적하였듯이 사회다원주의의 우존열망(優存劣亡)이라는 주장에 공감을 느낀 것이었다. 무릇 민족국가의 형성과 존립을 위하여 외부세력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곳에서 민족주의는 투쟁적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초기의 단재는 외경력(外競力)의 강화를 역설하고 나아가 대외팽창을 찬양하기까지 하였다. 을지문덕주의를 제국주의라하여 찬양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후기에 가서 그가 이를테면 선언문에서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식민지 무산 민중의 투쟁」을 외치게 되면서는 본래의 입장에서 벗어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상고사』등의 역사서술은 여전히 대외관계. 대외투쟁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동 147~148쪽)

위 인용문과 그 앞 인용문 사이에 생략된 부분에서는 전반적 문맥이 미슐레나 게르비누스는 미래재향적으로 자유와 진보 평등의 민주주의를 지향했으나 드로이젠의 군사적 팽창주의적 사관이 제국주의의 표방에까지 이른 것 같이 일제하의 단재도 대외투쟁을 중시하는 관점이었다는 말인데 통일을 성취하려는 확대정책의 독일과 민족인멸의 파탄지경으로부터 민족의 뿌리와 자긍심을 되찾아 민족을 살리고자 하는 단제사관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여 대외 투쟁을 성토하는 자체가 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프랑스나 영국이 미슐레나 게르비누스의 자유와 진보, 평등의 민주주의를 통한 과거보다는 현재 및 미래를 지향한 역사관에 흘렀다 하여 팽창정책을 쓰지 않았는가. 드로이젠이 독일의 통일을 앞세워 군사적 팽창정책을 뒷받임 했다하여 1.2차 대전의 제국주의 충돌전쟁이 정작 독일만의 책임이었던가. 그래서 그런 배태적(胚胎的) 위험 때문에 드로이젠류의 단재사학인 민족사학의 방향은 지양(止揚)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지금 우리 형편에 적용될 수 있을까.
한국상고사의 실상은 대외진출의 웅장한 시기였으며 한민족 자긍의 시기였음이 틀림없는데 그 역사를 바로 들추고자한 것이 독일같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를 고무하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 현대의 군사력은 외교적 시위력에 불과하여 영토점령이 아니라 일본이나 미국같이 경제적 문화적 제국주의시대다. 원인이 다른데 서양과 비교해서 한국민족사학을 평가하여 독일 같은 전철을 염려하는 것은 노파심에 불과하다. 우리에게는 그 인(因)으로서 깊고 드높은 철학이 있다. 홍익인간 이화세계(理化世界)라는 철학 말이다.

민족사학은 팽창주의가 아니다
이어서 논자는 미슐레와 프랑스의 자유민족주의가 자유주의내지 민주주의 공화국을 탄생시킨 것을 높이 평가하고 프로이센의 비민주적 정치체제를 받아들인 독일의 드로이젠과 바움가르텐의 민족자유주의의 결과적 과오를 설명한 후에

한편 단재의 경우에 민족주의가 무정부주의와 결합하였다. 민족을 민중으로서 파악할 때 그들을 억압하는 내외의 지배세력을 일거에 타도함으로써 자유를 얻는다는 그 정강(政綱)이 민족해방운동에 바로 이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임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실상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이른바 분리주의자들은 ‘아나르코생디칼리슴’이라는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 이론에 의거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민중의 ‘직접혁명’이라는 그 행동 강령이 단재의 공감을 샀을 것이다. 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자치권이나 참정권을 요구하는 ‘타협’논자나 문화운동을 주장하는 ‘기생’주의자를 규탄하고 외부세력에 의존하려는 ‘외교논’자나 우선 힘을 길러야 한다는 ‘준비논’자를 비판하고 있으므로, 남은 것이라곤 민중의 직접 행동에 의한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시 그 선언 속에서 그는 ‘고유적 조선’’자유적 조선민중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경제의’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는 ‘민중 전체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파괴함’이요. ‘민중생활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경제약탈제도를 파괴함’이었으니. 그가 선언문에서 ‘무산대중’이며 ‘무산민중’을 치켜든 것과 아울러 말년의 그의 사회주의적 경향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민족주의는 사회주의와 결합할 수도 있다. … 독일의 민족주의자들이 뿌린 나쁜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 민족주의란 코온의 말마따나 “종교와 마찬가지로 성질이 아주 다른 갖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는”것이다.(동 149~150쪽)

이 부분은 광복투쟁을 하는 시점에서 각자가 주장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에서 단재가 주장한 방법의 일맥일 뿐 단재의 민족주의가 무정부주의 사회주의와의 결합 가능성을 예상함은 침소봉대요 비약이 아닌가 한다. 설사 단재의 민족주의가 무정부주의 사회주의와 결합했다 하여 오늘의 민족사학이 무정부주의·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와 결합하겠는가. 나쁜 씨앗이 열매를 맺는다. 민족주의는 종교다라는 극단적인 비유를 보라. 이 논조야말로 자유주의 진보주의를 내세우면서 시대역행적인 주장이 아닌가 한다.
 

길현모 교수의 〈민족주의사학의 문제〉는 앞서 〈민족주의사학의 유형〉에서 어느 정도 거론되어 중복되므로 다소 길게 인용하여 독자의 판단에 맡기는 대신 비평은 생략하거나 간단히 하겠다. 이 논자 역시 ‘우리의 민족주의’에 대하여 시대감각에 미흡한 이해를 하고 있으므로서 독일형이나 심지어는 일본형 민족주의와 같이 사악시 되는 결과로 유추하고 말았다.

역사학의 낡은 인습적인 모델이 청산되고 새로운 합리적인 모델이 대치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현대사학의 공통된 과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청산되어야 할 낡은 모델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며 새로운 모델이 어떠한 것이어야만 하는가의 문제는 각 사학계의 특수한 실정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학계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현황이 원시적인 것으로부터 현대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복잡한 혼성양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처리는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낡은 요소들 중에서도 우선적인 검토 대상이 될 만한 것을 추려내라고 한다면, 첫째로는 랑케사학의 전통이 해당될 것이며, 다음으로는 이른바 민족주의사학의 전통이 이에 해당 될 것이다(동〈한국사 시민강좌〉의 〈민족주의사학의 문제〉151쪽)

민족주의에 대한 고찰에 있어서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그것이 현대사학의 주류속에 차지할 수 있는 여지를 이미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19세기 사학의 유물이며, 오늘날의 선진사학계에 있어서는 민족주의적인 역사서술을 펴내는 역사가는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중략? 심지어는 민족주의사학의 본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독일에 있어서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과거의 전통은 청산되었고, 일본의 경우에도 근래의 교과서 편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주의적인 역사서술은 비판과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선진사학계에서 민족주의적인 역사가 금기시 되기에 이른 데에는 그에 해당한 몇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즉 첫째로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민족주의의 과제는 이미 완수되었고, 따라서 민족주의시대는 끝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중략…이들의 민족주의는 노쇠한 것이 아니라 필요 없게 된 것이며 따라서 민족주의사학도 설자리가 없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는 민족주의의 악폐에 대한 인식이 널리 보급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민족주의는 초기의 낙관론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심각한 부정적인 측면을 수반했고, 양차 세계대전의 시기에 이르러 그것은 극단한 양상에 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중략……. 오늘날 선진국의 유식층들에게 있어서는 민족주의는 배격되어야 할 악이며, 그것은 배타적 선민사상을 고취하는 것, 권위주의와 전체주의를 조장하는 것, 군국주의와 전쟁을 찬양하는 것, 소수집단과 소수민족들의 자유와 권리를 유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통념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민족주의사학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셋째로는 민족에 관한 낡은 인습적인 개념이 통용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다년간에 걸친 과학적인 연구성과들은 혈통의 순수성이나 언어의 순수성 그리고 문화와 관습의 고유한 순수성 등에 대한 통념들을 분쇄하였고, 민족 형성에 관한 초역사적 신화적 해석들을 통용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민족주의에 대한 재래의 비합리적인 신앙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민족주의사학의 학문적인 타락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에 걸쳐서 민족주의사학은 최소한도의 학문적 객관성마저 희생하면서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전락한 바 있었다. 독일사학이나 일본사학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 이러한 타락상은 민족주의사학의 신용 실추에 크게 이바지한 바 있었다. 그러나 선진강대국 등과는 달리 아직도 민족주의의 긍정적인 과업을 달성하지 못한 민족들에게 있어서는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인 비중은 여전히 클 수밖에 없으며, 역사학이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동 152~154쪽)

첫째 이유에 대한 해명은 논자가 스스로 설명하였고 둘째 이유에 대한 비평을 한다면 독일이나 일본에게나 해당된 사항을 우리와 동일시하여 우리의 민족주의를 그들 것과 함께 동일시 할 수는 없다. 배타적 선민사상은 독일이나 유태인 일본인에게나 해당된 사항이요, 권위주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전쟁찬양론도 독일이나 일본에게, 소수집단 소수민족의 자유와 권리유린은 영국·프랑스·스페인·독일·일본·소련 등 서구강대국 및 식민제국주의 전체주의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다. 우리는 배타적 선민사상이 아니라 한주의, 홍익주의가 있다.
셋째 이유는 세계가 개방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여 혈통과 언어의 순수성, 문화관습의 고유성에 대한 관념을 낡은 민족개념이라고 성급하게 단정할 단계에 와 있는지 의심스럽다. 오늘날 민족주의를 배척하고 있는 사람들은 안호상 박사의 말과 같이 소련의 공산주의자들, 아메리카의 자본주의자들, 한국의 사대주의자들뿐이라고 하면 과장된 표현이 될까.
서양식 직접침략적 민족주의와 소련식 직접·간접침략적 민족주의(소련은 외국의 민족주의는 부정하지만)에 비하면 배달식(壇國式) 홍익인간적 민족주의는 금기시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뜻깊은 역사적 사실과 그 사상(신앙)으로 학자들의 연구방향을 돌려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며 무조건적 거부반응을 지양하고 긍정적 방향으로 접근해 보라고 권하는 바이다. 그것을 이해하면 프랑스나 영국의 민족주의는 미래지향적이었고 독일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것도 과거 지향적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야말로 인류를 위한 미래를 열고자 고유한 우리의 과거(역사와 사상과 신앙)를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또 신화적 해석들을 초역사적이라고 통용하지 않는 나라는 과학적 합리적이고 통용하는 나라는 엉터리일까. 여기서는 논자의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고 논자의 편견이 아닌가 한다.

민족사학은 홍익주의의 자리이타(自利利他)사상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민족주의사학이 어느 정도 비과학성은 있을지 모르지만(사실 자연과학에서와 같은 완전한 객관성 과학성은 바랄 수 없다) 정치적 도구가 됐다든지 어떠한 과업 때문에 학문적 타락성으로 까지 발전되었거나 발전될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재야 사학측의 주장을 학문적 독단 또는 타락이라고 보는지 논자의 내심을 알 수 없다. 결론적으로 위 인용문에서의 결론과 같이 우리나라에서는 민족주의사학이 설자리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민족사관은 현대사학의 주류를 상승적으로 유도하면서 다부지게 정립하여 나가고 있으며 국학 중흥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학에 대한 민족주의의 영향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음으로 우리가 고찰해야 할 문제는, 지금까지 우리의 민족주의사학이 수용해 온 민족주의의 성격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에게 적합한 민족주의의 성격은 어떠한 것이어야만 하는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것은 곧 민족주의의 유형의 문제에 해당된다.
민족주의의 유형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 자체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속성에서 비롯된다. 즉 민족주의는 그것이 추구하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현할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자체 내에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말하자면 어떠한 노선과 어떠한 기본설계에 따라 그것이 달성되어야만 하는가를 민족주의 자체는 말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그것은 그 밖의 본격적인 이데올로기들과 비교될 때에 하나의 불완전한 이데올로기이거나 이데올로기에 준 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민족주의는 그 실천 과정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밖의 이데올로기와의 결합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민족주의의 그 밖의 이데올로기와의 결합 가능성은 거의 무한정 하다고 하리만큼 자유로우며, 사실에 있어서 그것은 근대 이후에 나타난 어떠한 이데올로기와도 결합이 가능했다. 심지어는 그 기본성격에 있어서 세계주의적이고 민족의 소멸을 예언한 공산주의와의 결합도 가능했다.(동 154~155쪽)

여기서도 우리의 민족주의가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나아가서 공산주의와의 결합 가능성까지도 논하면서 정작 한주의의 홍익주의 자리이타사상(自利利他思想)이 단재의 목적이었다는 것을 간과함으로써 이 논문의 허점이 드러나고 있다고 보겠다.

그렇다면 과거의 우리의 민족주의는 이들 중 어떠한 유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 중략 … 프랑스를 전형으로 하는 서방형 민족주의의 모델이 선진국 민족주의 일반의 원형에 해당되는 것임에 반해, 독일을 전형으로 하는 동방형 민족주의의 모델은 후진국 민족주의 일반의 원형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있어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과거의 우리의 민족주의가 그 사상적인 유사성에서부터 표현방식과 수사의 유사성에 이르기까지 거의 독일적인 특성을 그대로 옮겨놨다고 하리만큼 흡사한 성격을 지녀왔다고 하는 점이다.(동 155~156쪽)

논자는 프랑스형이나 독일형 모두 서양식 직접 침략적 민족주의로 변절된 데 대해서는 언급을 안하고, 구태여 우리 것을 독일 것과 유사화하여 비교하려는 의도는 형태의 유사성을 가지고 그 결과를 유사하게 부정적으로 유도하려는 것 같으나, 이는 우리 민족주의의 실상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나온 결과로 본다.
또한 앞 논문 〈민족주의사학의 제유형〉에서는 민족주의를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면서 독일형과 후진국 피지배민족주의인 우리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해놓고서는 독일형과 유사한 결론이 나왔고 여기서는 아예 독일형과 흡사하다고 하는 상치된 듯한 논리를 발견할 수 있으나 이는 원인-진행-결과의 절차상 문제로 별 토의 거리가 아니라 생각한다.

독일민족주의의 가장 큰 특성은 그 핵심에 해당되는 「민족문화론」과 「민족정신론」이 낭만주의의 기조를 이루는 개체사상과 복고적 전통주의 그리고 환상적 시적 성향에 의하여 철저히 물들여졌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상적인 맥락 하에서 문화와 역사 전반에 관한 전연 새로운 가치기준이 창안되기에 이르렀으며 ‘개성적인 것’,’고유한 것’,’순수한 것,’낡은 것’에 대한 유례없는 숭상이 시작되었다.
… 중략 … 그리하여 ‘민족정신’에 유래되는 이와 같은 고유한 특성을 순수하게 보존하는 것이 독일인들의 신성한 책무라고 강조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민족적 자질의 근원에 해당되는 피와 언어의 순수성의 보존은 지상의 과제에 해당되며, 모든 이질적인 것과 외래적인 것에 대한 배격이 수반되었다. 그리하여 외국어, 외국인, 외국의 문화와 제도에 대한 적대와 모멸은 유례없는 경지에까지 달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극단한 배타적 선민주의와 복고적 국수주의, 그리고 보수적 군국주의는 독일민족주의의 기조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그것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독일사의 주류를 이루었다. 물론 당시의 독일에도 이와는 반대되는 사상, 즉 자유주의. 합리주의. 보편주의. 평화주의를 창조했던 사상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레싱, 흄볼트, 괴테, 실러, 하이네와 같은 사상가들은 민족주의를 ‘질병’과 ‘광기’라고 하면서 이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소수의 절규에 불과했고 결코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독일의 사상계를 풍미한 민족주의는 특히 역사학계에 지배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프러시아학파를 중심으로 한 독일 사학자들은 역사학의 목적을 민족주의를 지지하고 고취하고 선전하는데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사학이 극성기에 도달한 트라이치케(Treitschke)에 이르러서는 나는 “교수이기보다는 천 배나 더 애국자이다”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이 말은 역사학이 이미 학문이기보다는 정치적 선전의 장으로 전락했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그리고 트라이치케의 글들은 그 번역물 그대로가 제1차 세계대전시대의 영국의 대독선전물로 이용될 수 있을 정도로 극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독일 국민들의 우상이었고 커다란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동 157~159쪽)

꼭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꼬집어 놓은 것 같다. 이른바 민족사학측과 관학파 사학측의 대결양상이다. 여기서도 민족사학측은 국수·복고 등 질병·광기의 대명사요, 관학파측은 자유·합리·보편·평화의 진취적 기상으로 암시되어 있다.

이상에서 개관한 독일민족주의의 특성은 우리에게 있어서 참고자료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이미 누차에 걸쳐서 언급한 바와도 같이 그것은 역사적 성립조건의 공통성에 있어서나 사상적 기조의 전형적 특성에 있어서나 후진적 민족주의의 원형에 해당되는 것이다.
… 중략 …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에 우리의 민족주의가 일관해서 고수해 온 여러 전통들, 말하자면 민족신화론과 고유문화론, 피와 언어의 순수성에 대한 숭상, 국수주의와 배외사상, 역사의 신화와 조상숭배 등의 여러 경향들은, 문화와 역사의 과거의 영광에 의지 할 수밖에 없었던 민족주의 고취의 일반적인 방식 이외의 것이 아니었다. … 중략 …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시대적 성격과 역사적 조건은 선인들이 처해 있던 그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상과 학문이 그것이 형성되는 역사조건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면, 우리의 민족주의와 민족주의사학의 성격도 오늘의 상황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재래의 민족개념은 보다 현대적이며 과학적인 개념으로 바뀌어져야만 할 것이며, 혈통과 언어 그리고 문화의 순수성이나 고유성에 대한 관념은 지양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의 사상적 기반 자체가 보수적·복고적·신화적·폐쇄적·과거지향적 이념에서 벗어나서 합리적·보편적·개방적·국제적·미래지향적 이념으로 전환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들은 이미 민족의 일체감과 소속의식을 고유문화에의 귀의를 통해서만 조성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오늘날의 그것은 민족 성원의 자유와 권리의 동등성, 사회적 권익과 복지의 평등성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는 견지에서 정치적 사회적 제조건의 근대화가 민족주의의 진정한 기반이라는 점이 자각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오늘날의 민족주의가 결합할 이데올로기는 국민적 이념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 이외의 것이 될 수 없으며, 우리의 역사학이 받아들일 수 있는 민족주의도 바로 그러한 것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동 159~160쪽)

독자들은 이 논리에 현혹되는가,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원하고 있다는 것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그러나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건성으로 서양물 든 사람들이 망치고 있다. 그들은 미세 분야를 분석하는 학자는 될지언정 인류사를 개관할 수 있는 진정한 역사가나 사상가는 되기 어려울 것이다. 과거지향성이니 미래지향성이니를 논할 자격이 없는 지도 모른다. 합리적 개방적인 것인 양 번듯한 결론 같으면서도 뼈대 없고 국적 없는 유량민족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우선은 내 것의 진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국민족사학의 진면목은 하나주의이다
민족사학(민족사관)과 민족주의사학(민족주의사관), 식민사학(식민사관)과 식민주의사학(식민주의사관)은 뜻이 다르다. 민족사학을 하는 사람은 자연히 민족주의사관으로 흐르기 쉽고 일제가 식민사학을 정립코자 하니 저절로 식민주의사관을 채택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따라서 식민사학이나 식민주의 사학은 동의어로 보더라도 민족사학과 민족주의사학은 엄연히 구분된다. 백보를 양보해서 민족사관을 배타적 국수적 민족주의사관이라고 하자. 우리가 민족주의사관을 고집해서는 안된 다는 이유를 독일이나 일제와 비교해서 결론을 추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구나 서양적 이원론에 빠져서 독일식 아니면 프랑스식만 볼 수 있는 시야(視野)와 사고(思考) 수준으로 한국사학을 정립하려는 한국의 민족사관이 지향하는 목적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그 외양(外樣)만 가지고 독일식이다 하고 단정하는 것은 협량한 독단이 아닌가 한다.

그들은 한사상의 3태극 중용의 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자본주의의 자유지향성과 공산주의의 평등지향성이라는 평행선적 이원론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이 상보적으로 조화합일하는 방향으로 즉 한주의(하나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한주의적 한국사관을 독일식 민족주의사관으로 동일시하여 보수적 과거지향적 등등으로 본다면 나무는 보고 숲은 못 보는 결과가 되고 만다. 오늘날 구정치인이 물러나고 참신한 세대의 출현을 바라고 있듯이 학계에서도 세대교체·사상(사관)교체가 절실히 요청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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