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아먼, 仙, 종교, 문화, 문명에 대하여

 

우리 고유의 신교(神敎)와 불교 등 동방의 종교는 발생 배경이 숲의 종교라면 서양의 종교는 사막의 종교라 한다.
그런데 사막의 종교인 기독교 창세기에는 실과(實果)가 풍부한 낙원인 에덴 동산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에덴은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를 말하는 것일까? 종교의 성지라면 예루살렘이나 사우디의 메카나 인도의 가비라성으로 알고 있지만 종교의 본원지는 놀랍게도 우리가 샤아먼이라고 부르는 무당(巫堂)들의 숲 속인 시베리아 샤아먼의 고향이나 길림(吉林), 계림(鷄林), 시림(始林)이라고 일컫는 만주의 숲 속이라는데 신빙성이 가고 있다. 吉林, 鷄林, 始林은 만주어로 ‘찌린’으로 동일하게 발음되는 신들의 숲이며, 蘇塗를 뜻한다.
옥저(沃沮)라는 나라도 만주어로 ‘와지’이며 와지는 삼림(森林, 숲)을 뜻하는데 옥저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신라의 전신(前身)인 ‘시라(尸羅)’라는 국호가 吉林, 鷄林, 始林이라고도 표현되었으니 여기서 고대 국가와 샤아먼과 숲의 관계가 중요하게 떠오르고 있다.

근세 서양인들이 만주의 무당 굿 놀이를 보고서 만주 말대로 샤아먼(薩滿.살만,Shaman)이라고 불렀는데 샤아먼은 바로 무교(巫敎), 비약하면 신교(神敎), 선교(仙敎)를 뜻하게 된다. 이 무당은 신부, 목사, 장로, 승(僧).... 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교(仙敎)의 직칭(職稱)인데 이것을 미신으로 보게된 것은 불교, 유교, 기독교, 공산주의자가 들어온 후 그들이 선교를 부정하고 박대하고 선교문서(宣敎文書)를 없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무당은 교황청이 없는 카톨릭의 신부처럼 교조(敎祖), 교의(敎儀), 교단(敎團), 바다(龍宮)등 종교의 나라를 잃어버린 성직자들의 후예들로서 그들은 체계를 잃어버린 성직자이고 품위와 그 본질적인 능력을 상실한 한 낱 괴이한 기능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샤아먼과 신부 및 목사의 지위가 별반 다를 바 없으며 샤아먼을 폐쇄적인 성직자로 규정한다거나 또는 신부 및 목사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는 열려진 성직자처럼 특별하게 규정하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註①

무(巫)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고 글자모양 그대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남여쌍(男女雙)들의 성직자들이요 공인(工人)이었다. 무당이 굿을 해야 만사가 형통하고 병이 낫는다. 아이를 낳는다고 다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인이 될 수 있도록 적당히 먹이고 잔병치료도 하고 교육도 하는 등 굿(몽고말로 입지조건)을 잘해야 되고 굿이 맞아야 한다. 굿이 잘 못되거나 틀리면 정상적 인간이 될 수 없다. 이 굿을 전문적으로 하는 집단이 동이(東夷)의 선인(仙人) 집단으로서 이 이승(夷僧) 집단이 머무는 곳이 신시(神市)의 소도(蘇塗-小神壇)요, 수두(인도의 Stupa와 동일개념)요, 臣蘇塗(大神壇)이었다. 또한 별읍(別邑)이라고도 했다. 그들은 역사가 천문학자 점성술가 음악가 기술자 기능자 였으며 의사요 스승(師巫)이요 신선(神仙)이며 도인(道人)들이었다. 유사시 그들은 전장에 나가는 무사(武士)들이었고 납이나 쇠 등 비금속(卑金屬)을 황금으로 바꾸려 시도하듯 인간을 만드는 도인이며 연금술사(練金術士)들이었다. 그들의 조상이 또한 활과 화살을 전파한 숙신공시(肅愼貢矢) 전설의 주인공들이었으며 활과 화살은      의 기하학(幾何學)과 수리학(數理學)을 만든 효시(嚆矢)가 된다. 註②
이 굿이 불교에서는 ‘연(緣)’으로 표현된다. 인(因)-연(緣,굿)-과(果) 인과(因果)의 법칙에는 연 곧 굿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국 역사에 하, 은, 주, 진, 한〔夏, 殷(商), 周, 秦, 漢〕 다음에 위(魏)나라가 있었는데 위나라는 중국인들이 기피하는 바와는 달리 자기네 사서(史書)에다 단군조선에 관한 일을 엄연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무제(漢武帝)가 중국 땅에서 동이족의 실권(實權)을 무너뜨린 후 유교를 국교로 삼았으나 여전히 동이족의 세력이 대륙에 잔존하였으며, 3세기에 한(漢)에 반하여 일어난 위나라는 동이교(三韓)의 부흥을 꾀하여 그들 국가의 기반으로 삼았다. 동이의 종교(우리 옛말에 종교라는 말이 없었으나 표현상 종교라 부름)를 신봉하고 천자가 되는 계약을 맺은 위나라는 그들의 교황국인 조선에 조공(朝貢)을 바쳤으므로 조선에 관한 기록을 빼놓고서는 그들의 역사를 전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기(古記)에 위서운(魏書云)하는 기록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 외에도 중국의 조정이 동이의 임금에게 조배(朝拜)하는 기록이 여러 군데 있으므로 중국인의 입장에서 수치스러운 책이라 하여, 후에 이 위서(魏書)를 없애버렸다 한다.

황제 헌원이 청구국의 삼청궁(三靑宮)에 들어와서 수업한 후 자부선생(紫府先生)으로부터 내황문(內皇文)을 받아갔으며, 내황문이란 제왕이 되는데 필요한 부명(符命)과 도록(圖錄-河圖, 洛書, 天符經 등)으로 짐작되고 이때의 조선이 동이의 신시(神市)이며, 이 신시가 동이시대의 교황청(敎皇廳)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황제가 동이의 Stupa에서 수도한 후 ‘인자(人者)’가 되어 세상으로 나갔다 해야 옳을 것이다. 곧 신시(神市)에서 인시(人市,人世,俗世)로 나간 것이다.
순(舜)도 조선에서 벼슬을 하지 않고 중국으로 나갔다고 쓰고 있는데 신시보다 인시로 나가는 것을 더 보람있는 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공자가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슬퍼하여 구이(九夷)에 살고자 했다’는 말과 같이 인간계에 환멸을 느끼고 신시로 들어가려는 역작용도 있었다. 정치적인 의도(意圖)도 있기는 하지만 은(殷)의 기자(箕子)나 위(魏)의 만(滿)도 이런 부류로 볼 수 있다. 동이가 ‘人’을 궁극적인 이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종교의 궁극적인 이상이 ‘홍익인간’으로 나타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동이는 기하학이나 연금술을 연마하면서 점성술을 행하는 고대 종교의 승단(僧團)으로서 재세이화 홍익인간(在世理化 弘益人間)을 이념으로 하여 고대 문명을 지배해왔던 강력한 종교집단이었으며 동이의 임검(任檢)이 동이에게는 교황(敎皇)과 같은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동북아세아 일대에서 나오는 쑥과 자연산 마늘은 그들 밀교(密敎) 수행자(修行者)들의 필수적인 식품이었으며, 그들과 같이 수도(修道)하는 웅호(熊虎) 여러 족속에게 수련기간 동안만은 그들이 먹는 식품으로 지내도록 하면서 석 달 열흘 (100일)동안 햇빛이 차단되는 울창한 숲 속에 있는 신시(神市)의 절(寺:뎔→일본말의 ‘데루’,절이라는 말은 우리 고유의 수양장소를 말하는 것이며 불교가 들어와서 생긴 말이 아님)이나 동굴 속에서 근신하면서 三七日(21일)의 계(戒)를 지키도록 하여 ‘人者’가 되도록 수행을 시킨 것이다.
동이의 종교는 천재교육의 필요성에 부응하여 실제로 미래의 재목인 ‘동자(童子)’를 키워내는 일에 종사하였으며, 이 동자가 군주나 지도층이 된 후에는 그 신시에 다시 보답함으로써 성소(聖所)로서의 신시의 권위와 명맥은 유지되어 나갈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아이를 낳으면 7일과 3·7일, 100일의 풍습이 생긴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냥이 한갓 스포츠나 생업수단이 아니었고 진리탐구의 수도 과정이었듯이 [무속(巫俗)에서 사냥은 Shaman수업(修業)을 위한 특별한 수련기간이었고, 名包手는 진리(人)를 획득한 사냥꾼이라는 뜻이었다] 선약(仙藥)이요 신초(神草)인 인삼(人蔘)을 채집하는 일도 신선(神仙)사상과 인본주의(人本主義)를 실천하는 도장(道場)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이의 나라는 인(仁)과 군자(君子)의 나라로 알려지게 된 것이며 배달도, 국선도, 화랑도(倍達道 國仙道 花郞道)가 나올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단순히 미신으로 알고있던 무(巫)의 인(人)이 아니라 인자(仁者)와 군자(君子)와 선인 신인(仙人 神人)으로서 신명(神明)들린 무인(巫人)이요 무당(巫堂)이요 신명기(神明氣) 가진 夷僧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벌써 1만년 전부터 인류 종교의 메카였고 앞으로 머지않아 현대의 교황국으로 되살아 나는 바탕과 원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註③

역사는 종교성에 의해서 변환된다는 역사의식이 있다. 종교성에 의해서 만남으로써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미신으로서 만의 무적(巫的)이 아니고 그 본래의 뜻대로 선적(仙的)으로 지도력이 발휘될 때에 나라는 융성하고 일어설 때이다. 한국인의 뿌리는 선적 종교성(仙的 宗敎性)이다. 우리에게는 원래 신명이라는 말은 있어도 종교라는 말은 없었다. 신명사상(神明思想)이 바로 우리의 종교성이었다. 신명났다 신바람났다는 말과 같이 우리는 신명기(神明氣)를 갖고 살아온 민족이다. 신명 즉 신바람이 났을 때에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다.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저력을 내뿜었다. 이때까지 우리에게는 철학이 없었다.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민족철학을 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심오한 철학이 있어도 미신 혹은 무속으로 잘못 알았고 철학한다는 이들은 한철학이란 체계도 없고 철학이라고 할 수도 없다면서 서양의 칸트철학이다 뭐다 하면서 남의 것 흉내내기에 정신이 빠져 있었다.

민족사상(역사, 철학, 종교등)을 강조하는 이들을 일컬어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Chauvinist)라고 매도하는 풍조가 있다. 내 것 만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보수주의자이며 세계화시대 지구촌시대에 역행하고 시대감각에 뒤떨어진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계화 주의자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국지성과 역사의식이 그것이다. 인간은 국지적 존재로서 집, 고향, 조국 등 국지적 관계를 떠나서는 세계성을 생각할 수 없다. 말과 문화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흑인도 뿌리찾기 운동을 하고 있고 미국은 앞으로 유색인종지역과 백인 문화지역으로 연방이 분리 독립된다는 예상도 있다.
이렇듯 수많은 소수민족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과 행복은 그가 가진 인간적 가능성의 만개를 위한 조건, 그의 존재에 의미를 주고 그를 가장 편안하게 하며 그를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에서 얻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추상적인 세계성 세계화가 아니라 집, 고향, 동네, 친구들 그리고 동일한 말과 문화 역사 등 구체적이고 특수한 국지성이며 국지적 관계이다. 이 국지성은 세계성과 반드시 상치 대립되는 관계에 있지 않고 세계성 때문에 희생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계성은 국지성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해서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국지성을 무시한 세계화란 한낱 환상에 불과할 따름이며 오히려 우리의 국지성, 이를테면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이념이나 한글같은 문화유산, 그 외 많은 분야가 세계화 될 수 있는 여건과 자질이 구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마도 21세기 세계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이념이나 철학은 한국 땅에서 나올 것으로 믿어진다.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새로운 이념이 이미 구체화되고 있는 단계이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적 토양에서 배양된 국지성이 어떻게 세계성을 띄고 있는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역사의식을 되새겨 볼 때이다.
비근한 한가지 예로 오늘날 영어가 영국의 식민지 정책의 결과와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힘에 의하여 세계 공용어처럼 널리 사용되고 있고 그래서 영어 공용론도 거론되고 있으나 이것은 긴 역사로 볼 때 일시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오랫동안 한문이 판을 치더니 한때는 일본어가 풍미했고 이제는 영어가 판치는 세상이 와서 영어 공용화를 열창하는 신사대주의 세태가 되었지만, 우리 말 우리 글의 우수성 또한 세계 공용어 공용문자로 손색없이 갈고 닦을 수 있다.
영어가 판치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주장에는 무리가 없고 따라서 영어 조기교육도 일리가 있지만 민족어 교육에 지장이 될 정도로 민족어 교육에 앞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나 민족어가 사멸될 것이라는 전망은 잘못된 것이다. 어머니가 문둥이라 할지라도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을 것이라던, 유태인 아이자이어 버얼린 같은 조선인이 필요할 때다. 그래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국수주의와 개방적 세계관은 동전의 이면과도 같다.
오늘날 인도의 불교문명, 중국의 유교문명, 미국이나 일본을 통한 서구문명이 이미 토착화되었거나 진행중이며 이들을 무조건 배척할 수 없으며 배척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교통, 통신의 발달과 인적교류의 확대에 따른 지구촌시대에 종래의 배타적 권리행사를 위하여 확정된 현존하는 지리적 국경선이 이제 단지 형식적이고 선언적일 뿐 그 공허성에 대체할 새로운 개념으로 문화 영토론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앞으로는 세금 받치는 나라가 자기의 나라라는 말도 있다. Chauvinism적 애국심으로 대립과 갈등, 전쟁의 원인이 되어온 지리적 국경과 사상 등 인위적 장벽은 긴 안목으로 볼 때 하나씩 허물어져 나갈 것이다. 야생동물과 같은 생존영역 주장과 자기만이 옳다는 독선적 아집은 있을 수 없다.

인류의 화해로운 만남, 민족과 민족의 따뜻한 교류, 그것은 인류의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우리의 종국적 바램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될지언정 아직은 그것이 현실이 될 수는 없다.
투쟁이 없으면 분발, 전진하지 못하고 후퇴, 퇴락 한다. 정치와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평등사회가 실현되면 심화되어 가던 내부적 계급투쟁이 해소됨과 동시에 새로운 민족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아마도 앞으로는 무력투쟁 대신(무력은 하나의 示威力과 發言權에 불과) 경제적, 문화적 민족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먼 장래까지도 인류역사는 민족중심의 역사를 탈피하지 못할 것이다. 온 세계인이 Esperanto나 영어를 구사하는 국경 없는 국제인이 되는 것은 염원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기에는 아직도 요원한 일이다.
Pax Romania, Pax Espania, Pax Britanica, Pax Americana, Pax Japonica 등 역사적 강대국들의 자기 정당화 논리 즉 그들의 국수주의에 현혹되어 그것에 파묻히는 대신 우리의 국수주의 Pax Koreana를 어떻게 세계화 할 것인가? 한반도에서 인도 중국 미국 등 여러 나라의 문화영토가 중첩되어 설정될 수 있도록 개방적이었던 것처럼 한반도 이외의 지역에서도 우리의 문화영토가 설정 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고 그렇게 되고 있으며 또 될 수 있다. 우리는 서구 물질문명의 말기적 증상을 경계하고 우리의 따뜻한 문화영토를 확장해 나가면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전통문화의 파괴를 감수할 수 있다는 논리는 극히 한정된 부분에서만 인정될 뿐이다. 註④

오늘날 미국이 다원사회(Melting Pot)라고는 하지만 이는 인종적으로 본 다원사회이지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단일 사회이다. 마찬가지로 일본도 일본 神道 단일 문화 사회이다.일본에서는 기독교가 들어온 지 500년이 되었으나 기독교 신자가 전국민의 5%, 어떤 통계에서는 1%밖에 안되며 출생 및 결혼행사는 신도식으로, 장례는 불교식으로, 제사는 유교식으로 행한다. 그들은 天皇을 여호와보다 높이 믿는 국수성, 주체성이 강한 일본 신도 단일 사회이다. 우리나라야말로 민족 단일 사회이지만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종교 다원사회이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나라가 위대한 용광로, 도가니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한’이라는 철학적 역사적 토양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안으로부터의 어떤 분열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분열이 돼서 금방 파국이 날 것 같으면서도
곧 한 덩어리가 된다.

‘온’과 ‘낱’은 ‘한’의 양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철학에서의 통일성의 묘(妙)가 여기에 있다. 註⑤
 

다음은 서울대 종교학과 윤이흠 교수의 논설을 요약, 인용한 것이다.

  「다종교 상황에서 여러 종교들 사이의 관계질서를 창조한다는 것은 곧 성숙한 다원 개방사회(多元 開放社會)를 이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원 개방사회는 현대사회의 이상이며 지향이다. 따라서 한국은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성숙한 현대사회를 건설할 가능성을 약속 받고 있다. 다종교 상황의 관계질서를 창조하기 위한 노력은 곧 내일의 인류사회의 문화질서의 모델을 제시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종교사회는 19세기까지의 전통적인 종교사상의 틀 안에서 안주해온 전통시대(Traditional Age)를 거쳐, 금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가 지구촌으로 축소되고 급속한 산업기술의 발달로 신성(神性)의 모든 veil이 벗겨짐으로써 世俗化시대(Secularizing Age)에 귀착되고 말았다. 세속화는 인간정신의 자유화를 가져다주었지만, 그 자유의 대가는 궤도를 이탈한 인공위성과 같은 고독과 허무이다.
현대인의 허무는 그의 지성과 영혼을 감싸주는 靈性的 가치관을 상실한데서 비롯된다. 한마디로 세속화시대에서 인간은 신성한 귀의처(歸依處)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과학은 인간에게 편리는 약속하지만 행복과 영성적 귀의처는 제공하지 못한다. 세속화 시대에서도 인간은 귀의처가 요청된다. 그러나 현대 지성은 다음과 같은 냉혹한 사실을 거부할 수가 없다.  
  어느 한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다. 이러한 지적인 판단은 곧 내 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각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적 판단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현대 지성인은 다시 주어진 종교의 세계관에서 자기의 삶을 재구성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세속화 후기시대(Post Secularizing Age)라고 부르며 세속화 후기는 전통시대의 제국주의적 태도를 극복하고 동시에 세속화시대의 혼돈도 벗어난,
매우 세련된 지성적 조화를 유지한 태도를 의미한다. 두말 할 것 없이 이 태도야말로 다종교 상황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초석이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다윈 개방사회에로의 안내자이다.

  모든 종교적 신앙은 자기 종교의 신념체제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다. 동시에 현대사회의 문화 정황(情況)은 각 종교의 상대성에 대한 지성적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의 지성적 종교인이라면 이 두 개의 이율배반적 요청을 스스로의 신앙 안에서 조화하려는 노력을 외면할 수 없다. 이 노력의 정도가 곧 개인이나 종교집단의 문화적 세련도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어느 종교가 더 진실한가를 가름할 근거를 찾을 길이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누가 얼마나 세련된 현대적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는지를 가름할 수는 있다. 보다 더 세련된 현대적 종교의식을 갖고 있을 때 우리 사회에서 세속화 후기를 보다 성공적으로 추진하는데 공헌할 것이다. 종교계는 세속화 후기단계로 전환하기 위한 자체 개혁 운동을 전개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我와 他 특정 종교를 지적하고 싶지는 않지만 상대적인 각성이 필요하다는 점과 우리 사회의 가능성을 점쳐보는 입장에서 이 논설을 게재한 것이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장 홍일식 박사가 문화영토론에서 지적한바와 같이, 오늘의 인류문명은 서구문명에 의한 제국주의적 지배에 의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서구인들은 비서구 제국에 대해 무력적 침략을 통한 경제적 정치적인 ‘지배-종속’의 구조를 구축하고 문화제국주의의 틀을 확립함으로써 전통적인 서구 중심주의와 이에 호응하는 숭백주의(崇白主義)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적 제국주의가 인류문명의 앞날에 끼치는 가장 심각한 해독은 그것이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문화적 대안들을 철저히 폐기. 봉쇄시키려 든다는 점이다. 세계 각 민족이 저마다 꽃 피워온 문화양식은 결코 인위적으로 서열화 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자신의 문화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열등시하고 스스로 문화적 구원을 자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반문화적인 태도인 것이다. 지난날 서구문명이 보여준 군림과 강요의 자세는 스스로 자기한계를 확인한 오늘에 이르러 큰 혼란과 위기의식에 빠져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서구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세계적 영향아래 살고있는 모든 인류의 위기로까지 파급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문화적 세계주의는 각 민족의 문화들이 언젠가는 하나의 문화로 최고 지선의 인류문화로 통일 승화될 수 있다는 믿음 위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문화통일의 추진력은 문화 자체가 갖는 원리인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고유의 운동법칙에 의해 하나의 문화로 조화. 통일되어야 한다. 더욱이 ‘하나의 세계’에 대한 지향은 지난날 세계주의 또는 보편주의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제국주의적인 독선과 아집을 재현시킬 여지조차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세계’는 반드시 문화의 고유한 운동성을 통해 달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 통일체의 구현은 그것을 실천적 과제로 설정하기에는 너무 먼 미래에 속해 있을는지 모른다. 현 단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당면과제는 오히려 앞서 논의한 서구의 문화적 제국주의로부터 민족문화가 분리해 나오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궁극적 이상을 문화적 세계주의에 두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일단은 문화적 민족주의로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화단을 비유로 든다면, 오늘의 문화적 제국주의의 입장은 인위적이고 독단적으로 선택된 하나의 꽃으로 화단을 통일시키려는 의도를 갖는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화초들을 꽃밭으로부터 ‘강제적으로’ 구축함으로써 실현된다고 믿는다. 즉 꽃들이 스스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분위기를 처음부터 박탈하는 것이 된다. 이에 반해 순수한 문화적 민주주의의 입장은 꽃밭의 통일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화단이 결코 서열화 될 수 없는 각양각색의 꽃들로 구성되어야 하고, 꽃들은 자신의 모습에 끝까지 충실함으로써 전체적인 조화를 이룬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문화영토론이 상정하는 꽃밭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통일되어 가는 과정에 있게 된다. 즉 장기적으로는 문화적 민족주의의 분리. 독립을 극복하게 되고, 단기적으로는 문화적 제국주의의 문화외적 강제를 배격하는 것이다. 모든 꽃이 인위적인 선택에 의해 편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서로의 본 모습에 충실하게 되면, 꽃밭은 스스로의 운동에 의해 발전적인 방향으로, 비록 장구한 세월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가장 아름다운 하나의 모습으로 스스로 변모해 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문화영토론이 종래의 문화적 민족주의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갖도록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이상은 홍일식 박사의 논설 요지)

다원 종교 다원 문화사회가 된 한국은 바야흐로 어떤 꽃밭으로 조화되어 가는 전환기에 서 있으며, 우리가 어떤 굿판을 벌이는가에 따라 온 세계인이 구경하러 오고 배우고 부러워하는 화단이요 법왕청이요 교황청이며 메카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베이컨의 과학적 방법론이나 데카르트의 수학, 뉴튼의 역학, 로크의 계몽사상, 스미드의 국부론 및 다윈의 종의 기원론이 쌓아올린 기계적 세계관은, 목재-석탄-석유-원자력으로의 에너지 기반의 변천과 식민지 시대를 거쳐 산업자본시대로 이행하면서 국가기구의 비대화, 심각한 자연파괴와 공해유발, 인간성 상실 등 극심한 그 부작용에 직면해 있다. 베이컨, 데카르트, 뉴우튼의 시대가 지난지 400여 년이 되었는데도 현대인은 아직도 그들의 생각에 의거 생활하고 있으며 과학, 교육, 종교가 기계적 세계관의 확장을 위한 선도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러나 뉴우튼 고전물리학의 고정적 사고방식이 기반이 된 인간의 에너지 환경이 축적된 것(화석연료)으로부터 현대 물리학의 양자론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같이 ‘Dynamic Flow(흐름: 원자력과 태양광선, 재생 가능한 유전자 공학 자원등)’ 로 이행되어 가고 있듯이 뉴튼 과학의 위력과 이에 의거하여 구축된 세계관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오늘날 교육제도도 대학 졸업까지 뉴튼적 세계관에 의한 학습 프로그램이 전체적으로 12∼16년간이나 행해지면서 공업화를 위한 기계적 세계관의 진행을 위하여 적합하게 짜여진 전문가 양성제도를 계속하고 있으나 옛날의 도제제도(徒弟制度) 등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날이 왔으며,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지구 파괴적 사고방식이 가능케 하였던 대규모 집중 획일적 교육방식은, 이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처럼 소규모 분산된 다양한 도제교육방식으로 새로운 교육개념의 정립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종교에서도 기독교 신학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세기 1-28)”는 지배권이 땅을 가차없이 다루고 이용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자연에 대한 오만의 죄를 범해 왔으나, 이제는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봉사하고 자연의 작용을 경외하면서 보호하고 유지하며 가꾸어 나가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지배권을 소유와 이용의 권리로 생각하는 투쟁적, 정복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보살핌과 보호의 의무로 생각하는 합일적. 조화적인 신학적 사고방식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가시적, 감촉적 발전을 추구하는 서양의 고 칼로리 고 에너지적 사고방식은 자연을 정복함으로서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대량생산 대량소비에 의거 지구를 더욱 무질서하게 만들고 있으나, 이제 에너지의 흐름을 작게하고 자연에 순응. 조화함으로써 무질서가 더해 가는 것을 억제하는 동양종교의 저칼로리 저에너지적 가치를 중시하는 고대 동양 仙人(선비)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지상의 자원과 에너지는 유한하고 사회의 진보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인류는 기계적 세계관으로부터 탈피해야되고 새로운 시대질서는 앞서 언급한대로 과학과 교육 그리고 종교를 변혁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Western Dream, American Dream, Christian Dream의 몽유병으로부터 깨어나서 인간과 자연을 위한 인간적 세계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물질 중심적 사고로 굳어져있는 현대인이 종래의 고정관념들로부터 인생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혹자는 제1의 물결은 농경사회요, 제2의 물결은 산업화 사회, 제3의 물결은 정보화 사회이고, 급속한 정보화 사회를 거쳐 맞이하게 될 제4의 물결은 하느님의 자손인 인간을 비롯하여 창조주가 만든 모든 피조물 자체의 존재가치를 중시하는 存在의 시대가 될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필자는 제4의 물결인 존재의 시대를 상향나선식(上向螺旋式) 순환발전사관적 견해로 제3의 물결로부터 한 단수가 높아진 제1의 물결로의 복귀로 보고자 한다. 미래학자 샘 러브가「새로운 미래관」이라는 논문에서 적절한 ‘테크놀로지’를 정의하는 가운데 “지방에서 산출된 노동집약형이고, 지방분산형이며 회복이 가능한 것이고, 태양 등의 재생이 가능한 에너지로 연료가 보급되며,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또 지역사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또 E.F. 슈마하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저서에서 ‘중간 테크놀러지는 원시시대의 테크놀러지 보다 훨씬 뛰어나고, 동시에 근대사회 이후의 공업시대에 개발된 부유한 자를 위한 슈퍼 테크놀러지 보다 훨씬 단순하고 값싸며 자유롭다. 또 자주적 테크놀러지, 혹은 민주적 테크놀러지라 부를 수 있고 부유한 자와 권력자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는 테크놀러지다.” 라고 말하였듯이 생물을 다루는 농부처럼 모든 사람이 자연과 함께 생명을 가꾸는 현대적 농부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우주의 섭리와 조화를 도모하면서,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자연과 공존해 가는 길이며 그러한 만족감에서 생긴 인간적인 해방감을 체험하는데 있다고 先人들과 노자와 석가가 역설하였으며, 물질을 헛되게 소비하고 소유하며 물질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것은 적빈(赤貧)을 권하고 탈속(脫俗)하여 억지로 가난해지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물질에 집착하면 욕망이 생기고 욕망이 강해지면 욕심과 분노가 생겨 분별력을 잃게됨과 동시에 배가 불러지면 쾌락과 퇴폐에 빠지거나 교만해지고 난폭해져서 칼을 부리던가 나태하고 해이해져서 마약중독자 같이 되기 쉽다. 여기서 대부분의 미국 중류 기독교인의 조잡한 개인주의, 즉흥적인 진취정신, 무제한의 물질적 축재주의(蓄財主義)의 오류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註⑥
미국과 같은 대량소비국가가 하나만 더 있으면 이 지구는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미국은 이제 문명발전의 마지막 9단계에 와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註⑦
 

註①  朴容淑 著 「韓國의 始原思想」참조
        필자주 : 동북아 방대한 지역의 단군제국이 제 생명을 다하고 역사에서 사라지듯 이슬람의 원자탄 몇 방으로 지금의 예루살렘이나                      로마가 불바다가 된 후 1000년 2000년이 경과 했다고 가정할 때 그때의 신부와 목사가 금일의 한국무당이 되지 않는다고                      단정하지 못한다.

註②  朴容淑 著 「韓國의 始原思想」참조

註③ 上同
        필자주 : 86 Asian Game의 개막식에는 무속(巫俗)이 주제로 되어 있었는데 얼마나 웅장하고 장엄하였던가.
                     어질이(夷)자를 오랑캐이자로 잘못 알고 있었듯이 우리는 무(巫)의 본뜻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註④  홍일식 박사의 「문화영토론」참조

註⑤  김상일 저 「한철학」참조

註⑥  제레미 리프킨 著, 金鎔貞 譯 「엔트로피」 참조

註⑦  문명발전의 순서

       1. 굴종에서 영적 신앙으로
       2. 영적신앙에서 숭고한 용기로
       3. 용기에서 자유로
       4. 자유에서 풍성함으로
       5. 풍성함에서 이기주의로
       6. 이기주의에서 자기만족으로
       7. 자기만족에서 무감동으로
       8. 무감동에서 의존으로
       9. 의존에서 굴종으로

        또는

       1. 탄생(Genesis)
           - 독립탄생 : 桓國
           - 상속탄생 : 중국, Summer, 애급, 인다스, 아카드, 마야,  인카, 미국
       2. 성장(Growth)
       3. 좌절(Break Down)
       4. 해체 (Disintegration)
       5. 소멸(Disolution)
           - 未開轉落
           - 타문명에 동화

     세계문명의 평균수명을 200년으로 보고 미국문명은 1976년 독립 200주년을 황금기(Golden Age)의 극으로 하여 1주기가 지났으       며, 역사는 되풀이되어 순환 재생하던지 타문명에 바통을 넘겨주고 동화되거나 소멸될 단계. 역사는 80년대를 기점으로 바뀌고 있       다는 설.

      1780 직선 - 곡선운동(유럽의 철도)
      1880 중화학공업(미국의 자동차, 비행기, 조선)
      1980 전자정보(미국 및 동아시아의 정보혁명, 유전자 공학)


                                                                     
                      문화와 문명

     문화(Culture)는 문명(Civilization)의 바탕(씨앗)이고 토양이며
     문명은 문화의 진액, 열매로 볼 수 있다.


     인류혁명(2000만년 전-BC1만년)으로부터
     농업혁명(BC1만년- BC3500년)까지는 - - - - - 문화의 여명기,

     도시혁명(BC3500-BC 800)으로부터
     정신혁명(BC 800-AD 1600)을 거쳐
     과학혁명 (AD1600- )까지를 - - - - - - - - - - -문명의 발흥기로                                                                             볼 수도 있다.

     지금은 정보혁명시대로 초문명인 - - - - - - - - 우주문명시대로의
                                                                            진입이라 하겠다.



     (민족정기 제3호 心溪 鄭周永 논고 및 영남대 교수 李洋基의 「문명론」을 참조할것)

 

carp_back.gif  calm_up.gif  board_b_next.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