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건달들의 변(辯:말잘할 변, 풍류할 변)

 

여기 보니까 건달이들 많이 모였습니다.

회장 부회장은 큰 건달들로서 건달의 두목이요, 저기 ㅇㅇㅇ여사도 건달 근성이 다분합니다. 여기 ㅇㅇㅇ도 미련한 건달이고. 좀 저속한 예가 되겠습니다만, 미련한 똥구멍이라는 속어가 있습니다. 똥구멍이 미련하지요. 평생 살아있는 동안 먹고 난 찌꺼기 똥만 싸지요. 궂은 일 도맡아서 하고 있지만 안 싸면 죽습니다. 그런데 밥 잘먹고 잠 잘 자고 똥 잘 누면 건강합니다. 똥구멍은 풍백, 운사, 우사, 뇌공(風伯, 雲師, 雨師, 雷公)을 다 거느리고 있지요. 한배달이라는 밥만 먹고 그 방귀만 자꾸 붕붕 뀌어대니 저 사람 저렇게 건장하고 미련한 한배달 건달이지요. 건달이라는 말이 듣기 싫습니까? 싫지 않지요. 맞습니다. 싫을 수가 없습니다. 건달(乾達)이는 하늘에 도달한 사람, 양달 음달 하듯이 하늘의 땅, 낙원에 사는 사람 즉 天道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단군도 천도를 실천하는 건달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단군사상을 토론하고 앙양, 실천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였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머리 속에는 단군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몸 속에 단군이 들어있으면 여러분은 지금 단군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몸 속에 부처가 있으면 여러분은 살아있는 부처인 生佛인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하느님이 들어있으면 여러분은 하느님입니다. 人乃天이요 事人如天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 예수가 들어있으면 여러분이 바로 예수처럼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 선생이 나는 예수다. 수운선생이 내가 하느님이다 하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고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유태인 예수만이 예수가 아니고 천도를 실천하는 내가 바로 예수의 분신이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먼데 계시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이요 이웃이 하느님입니다. 여러분, 우리 다 함께 단군이 되고 예수가 되고 하느님이 됩시다.

단군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위대한 행동가입니다. 그는 그의 인류애 사상을 혼자만 알고서 애지중지 소중하게 간직하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천을 병행함으로써 위대해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석가나 공자나 예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감화력으로나 문장력으로나 웅변술로나 활동력으로서 실사회생활에 적용함으로써 모두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활동적인 달변가, 웅변가이면서 혁신적인 정치운동가 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조의선인( 衣仙人), 신라의 화랑도를 위시하여 역사상 수많은 재상 명장이 그 실천하는 행동력 때문에 유명해질 수 있었고 이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韓末에 와서 수운이나 증산이나 홍암이나 소태산 그 외 수많은 사상가나 운동가들이 민족의 한을 품고 참수 당하거나 무당미치광이 노릇을 하거나 애환에 복받쳐 자살을 하거나 터무니없는 짓을 한다고 손가락질을 받아가면서도 그들은 대각을 실천하여 대성을 해냈습니다.
자기죽음 자기초월을 통하여 천도교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 등 큰 정신 큰 업적, 한의 정신 한의 업적인 민족의 대업을 성취해 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특이한 일부 종교인(文善明, 朴ㅇㅇ, 曺ㅇㅇ 등)의 부정적인 면만 볼 것이 아니라 이와 유사한 방향으로 想定해서 그 일면을 긍정적으로 재평가 해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배달의 동지입니다. 자기죽음 자기부정 자기초월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한배달의 ‘한’에 도달할 수가 없으며 이것을 해내지 못하는 역사는 언제나 새로운 도약을 못하고 좌절하고 맙니다. 자기애(Eros)에 붙잡히게 되면 바로 그 순간부터 ‘한’은 ‘비틀리기’시작하거나 ‘시들기’시작하여 여기서 性, 먹이, 돈, 명예, 지식, 권력 같은 ‘한’의 ‘대치물’들이 쏟아져 나와 우리를 유혹하고 맙니다. 개체가 자기 죽음 자기초월을 하지 않는 한 총체성 즉 ‘한’은 실현되지 않습니다. 자기죽음의 밑거름이 있는 층에서만 위로의 層變을 일으킬 수 있으며 이를 의식의 상승 또는 역사의 발전이라 합니다.①
조절(Accomodation)과 동화(Assimiliation)가 잘 조화되는 것을 균형(Equilibrium)이라고 하며 ‘한’은 이 균형입니다. 그러나 自己愛가 자기죽음을 능가할 때에 ‘한’은 비틀리고 균형은 깨어지고 말며 의식은 상승하지 못하고 퇴행해 버리고 맙니다. ‘한’은 비록 스스로를 상대에 귀속시키면서도 그 자체적인 존재 속성에 의하여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이 오히려 운동의 배우에 남아 존재하며 그로써 최종적인 귀일(歸一)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은 존재 영원성과 비시원성을 나타내고, 自己無化의 형식은 곧 바로 利他와 사랑의 법으로 연결되는 존재속성이 되는 것입니다.②
자기무화는 자기죽음이 아니라 자기 전개로서 자기죽음을 통하여 자기를 전개하는 것입니다. 存在一者 즉 ‘한’을 실천하는 원리가 ‘자기 죽음’입니다. ‘한’을 발견한다는 것은 개체적 자아를 버리는 것이 아니고 개체 그 자체(Suchness:然)에 그대로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Naturally-so, Self-so:自然). 우리의 영혼은 궁극적으로 ‘한’ 즉 그렇고 그렇게 있음(That this is so, What-is-so-of-itself)을 한 번 직관(直觀)해 보려 또는 그 세계를 만나 보려 애타게 갈구하고 있는 것입니다.③
한의 정신은 알에서 머무르지 않고 얼로 깨어나는 과정입니다.④한알이 한얼로 부화하여 한울(한우리, 한세상)을 이루어 가는 과정입니다. 배달도를 하는 사람, 한 배달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계란을 모아서 쌓아 놓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봄이 되면 적절한 시기에 병아리를 부화시켜 成鷄로 성장시켜 또 큰 알을 낳을 수 있게 하고 고기도 먹을 수 있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자금력이 있는 사람은 자금력으로, 문장력이 있는 사람은 문장력으로, 조직력이 있는 사람은 조직력으로, PR능력이나 웅변술이 있는 사람은 그러한 특기로, 예술가는 예술적 재능으로, 학자는 학문적 자질로, 교수는 강의와 권위적 인기로, 사교술이 있는 사람은 사교술로, 저 같은 보통사람은 대범한 뜻과 동지애로서, 동지세력을 규합 확대함은 물론 우리의 높은 뜻을 펼쳐나가는 민족문화 인류문화활동 등 여러 분야의 사회문화운동을 펼쳐 나가면서 학술활동도 겸해야 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이상을 가장 확실하고 신속하게 전개하기 위해서는 별단의 정치활동을 목표로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친목활동과 사회문화활동은 기본으로서, 궁극적으로는 배달도의 높은 종교성향적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치활동은 불가피하게 될 것입니다.

민족사에 새바람, 신바람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황막한 벌판과 거치른 험산 계곡에서 살을 에는 추위와 창자를 비트는 굶주림을 참아내면서 일제의 총칼 앞에서 목숨을 바치고 독립군 자금을 바치던 그런 주체세력이 바람직합니다. 국가운명에 대한 강력한 공동인식의 단체로서 민족대업을 주도하는 선구적 세력으로 지향되어야 할 것이며, 선구적 세력이 있으면 주체세력은 형성됩니다. 금전에 팔리거나 권력에 눈이 먼 부패한 세력이 아니라 재산과 생명을 바치면서 나라를 구출하는 열성적 세력입니다.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열이 없어서 안 하는 것입니다. ‘한’이라는 존재일자는 空(天) 物(地) 時(人)로서 존재운동을 합니다. 一者 體는 三者 用으로 나타나며 마찬가지로 필요한 조직구성도 삼각편성의 원칙적용이 바람직합니다. 태양이 올라올 직전의 자연계는 도리어 잠깐 어두워집니다. 이때 더욱 주의가 요망됩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금방 둥근해가 불끈 솟아오를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이 출발 시점입니다.

이때 까지 우리는 ‘가로(ㅡ)’와 ‘세로(ㅣ)’ 라는 말에는 익숙해 있지만 ‘바로( \)’라는 말에는 생소한 것이 사실입니다. 가로 세로(十) 즉 평면적인 사고방식에는 숙달이 되어왔지만 ‘바로(     )’라는 입체적인 생각에는 서툴렀습니다. 여자(땅 ㅡ)와 남자(하늘 ㅣ)가 교차하여 人子가 탄생합니다. 포개만 놓은 정적 현상이 아니라 입체적 동작, ‘바로’운동이 있어야 곧 十門을 열(10, Open)어야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바로라는 삼차원이 작용하여야만 운동의 작용이 있을 수 있는 입체적 공간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서양의 지리적 방향인 동서남북(‘서+동’)을 고정적으로 생각해왔으나 반대로 동양의 易學的인 방향은 ‘동+서’ 로서 역동적 자연현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원, 평면적, 정적에서 삼원, 입체적, 동적으로 이 삼원적인 생각이 고유한 한국적 사고방식으로서 한철학 사상은 바로 3극의 세계관입니다.
역사적으로도 한인, 한웅, 한검(은 곧 하나님이다:윤성범, 박봉근) 환국, 배달국, 조선, 삼한, 삼국, 남북조, 고려, 조선, 현 한국의 1 2 3, 4 5 6 공화국이 있었고 또 전개될 7 8 9공화국, (파랑:남한쪾   빨강:북한쪾   노랑:만주)처럼 3용1체 현상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빨강 노랑 파랑색을 흰 그릇에서 붓으로 혼합을 하면 흑색이 되지만 삼색팽이를 돌리면 白色(無色, 광선의 빛, 밝음)으로 나타납니다. 남북한, 만주, 시베리아 대륙이 한 판(板)위에서 역동적으로 한 생활권이 되는 것입니다.
21세기에는 불가피한 상호교류로 인하여 인위적 국경장벽이 엷어지고 상호 삼투작용에 의하여 경제적 문화적 다방면으로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것이며 여건에 순응하여 노력하면 되는 것이지 무리하게 접근하거나 단번에 허물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소리 없이 되는 것, 無爲而化의 大爲로 되어야지 통일 또는 多勿이라는 구호를 자꾸 떠들어대면 오히려 역작용이 염려스럽습니다. 천방지축 학생운동이나 70년대 초에 월남을 패망으로 이끈 사이공의 종교 Vietcong의 징후 등은 경계해야할 대상이면서 반면 교사가 될 것입니다.

또한 근래에는 각계에서 경제투자를 빙자한 군비축소를 주장하는 논조가 많아지고 있는데, 물론 군도 저비용 고효율화로 구조조정이 되어야지요. 하지만 또 주위 강대국들에게 계속해서 나라의 운명을 맡기려 하는지 혼미스럽습니다. 우리가 북한만을 의식해서 무장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은 물론이고 통일 후에도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건설한다는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과다한 국방비 때문에 경제건설을 해내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과소비와 국민기강의 해이, 지도력과 통솔력의 결여로 경제가 덜커덩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군축은 미국이나 러시아 그 외 몇몇 나라들이 어쩔 수 없는 그들의 사정이지 소리 없이 재무장하는 이웃나라, 되살아나고 있는 우익의 망령과 대륙의 현대화 과학화한 전력 재정비 추세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지정학적인 위치에서는 주위 4강을 견제할 수 있는 경제력과 군사력의 건설·유지는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진리입니다. 500년 전에 율곡의 10만 양병설이 있었습니다만 그때에 비교하면 지금은 100만 현역과 500만 무장 예비군의 위세가 절대절명의 명제입니다.

아무리 국제화, 지구촌화가 진행되어도 민족국가, 국민국가는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민족의 특성을 건전하게 승화하고 일체감을 형성해야 미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적 미래적 여건으로는 더욱 현대화 정예화 한 대륙형 해양형 작전능력의 제고가 요망됩니다. 군무에 종사하는 이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대외 지향적 원대한 안목으로 국방력 건설에 매진해야 할 것이고 경제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3만불 소득 3000억불 수출(통일후 2020년경 가정)이라는 지상의 목표를 향하여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정치는 이러한 원대한 목표를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합니다. 7000만 한민족의 저력은 이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습니다.

북한이 조선말기 대원군의 쇄국정책처럼 시대에 역행하여 아무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어도 남북한과 전세계 한국인이 함께 봄볕에 얼음 녹듯 스르르 녹고 말 운명입니다. 새싹을 틔우기 위하여 씨앗이 뿌려지고 떡잎이 반으로 갈라졌지만, 지금은 씨는 밑거름이 되고 가운데 큰 떡잎이 무럭무럭 자라 올라오는 시점입니다. 그 떡잎의 주요부분이 다함께 큰 배달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 한 倍達徒입니다. 작은 씨알의 노력이 모여 큰 성취를 이루듯 悠長한 출발을 내디딜 시점입니다. ‘너의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너의 나중은 昌大하리라’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나라 한배달 한마음 같은 길로 운명 지워져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통일과 웅비를 바라고 있습니다. 혹시 내 한 사람이 바라지 않더라도 전체 민족의 바람(願)이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람(風)입니다. 바라는(願) 방향으로 바람(風)이 일어납니다. 그 방향으로 바람이 붑니다. 민족의 기풍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한민족의 원형질인 기(氣)와 풍(風)을 타고서 會三歸一의 진리는 도둑처럼 찾아옵니다. 요란하게 떠들석하게 오는 것이 아니라 氣차게 옵니다. 비록 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저나 여러분이나 수동적으로 기다리지만 말고 다함께 참여하여 태풍같은 신바람(神風)이 불어오도록 적극적으로 바람을 일으킵시다.
역사의 운명이나 역사의 바람이라는 것이 있지만 역사에는 불로소득이 없습니다. 8.15라는 불노소득은 결국 분단이라는 대가를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의 바람작전으로 역사의 운명적 바람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氣에는 물리적인 에너지(Energy), 사회적인 힘(Power), 민족적인 혼(Spirits, 士氣)등으로 짜여져 있는데, 이 기가 天機를 맞아 바람(願)이 바람(風)으로 나타날 때, 기풍은 풍류(風流:바람 흐름)로 나타납니다.
풍류도는 부루도(夫婁道)로서 부루다(潤), 번식하다, 번지다, 퍼지다, 많아지다, 번성하다, 밝다(光明), 깨끗하다(白), 불붙는다 등의 뜻으로서 우리 고유의 광명, 결백, 의용(光明, 潔白, 義勇)정신입니다.

 「國有玄妙之道하니 曰 風流라 ..... 實乃 包含三敎하야 接化群生이라...(崔致遠이 鸞郞花郞의 墓碑에 쓴 序文).」

풍류는 유불선 삼교를 내포하고 있는데 뭇 생을 접하여 교화하는 현묘한 도로서 天地人이 하나로 어울리는 예술입니다. 천지인은 하나의 유기생명체(有機生命體)로서 천은(天恩) 지덕(地德)으로 인생(人生)이 있고 부정모혈(父精母血)로 人子가 있으니 天父 地母 人子의 관계를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인체는 소천지, 소우주, 소자연으로서 인체 속에 우주자연의 신비가 들어있고 우리 몸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식이나 출신이나 권세나 재산으로서 존비를 따질 대상이 아니라 ‘존재하여 살아 계신다’는 그 사실만으로서 가치 있고 위엄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한 때 DIY(Do It Yourself)운동이 전개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스포츠는 구경하는 재미(to see)에서 직접 하는 재미(to play)로, 인생은 소유하는 소유가치(to have)에서 존재하는 존재가치(to be)로, 살림도 사는(구입하는) 재미(to buy)에서 만드는 재미(to make)라는 구호처럼 내 손으로 직접 함으로써 상실한 일상의 재미를 찾자는 반문명운동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계와 기계적 제도에 파묻혀서 나 자신을 잃어버린 물질적 존재에서 생존해 계시는 인간존재로 자성자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물론 인권의 자각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이 to have에서 to be로의 존재가치를 자각하게 될 때 to love로의 인생관의 전환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분위기도 하나의 풍류이듯이 우리의 생활자체가 하나의 풍류가 되어 모두가 제멋을 지니고 살아가는 한 멋진(멋있는) 삶의 장이 될 것입니다.
배달도는 한 멋진 삶을 영위해 가기 위한 하나의 도, 풍류도로서 이것은 인간자연의 본성을 회복해 가는 길이며 본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진정한 풍류사회는 이룩되지 않습니다.
인간본성을 회복하는데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가 장애가 되고 있지만 또 전술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우리의 수출목표까지도 가정하여 이율배반적 논리가 되겠지만, 물량주의, 물신주의는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으므로 풍류사회(21세기 신사회)건설을 위한 새로운 체제와 제도는 앞으로 계속 논의될 것입니다. 욕심과 주장(편견), 미움을 벗어나서 合意를 이끌어 내는 과정, 합의란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시키는 과정으로서 객관화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호 신뢰성(Reliability)을 높이는 것이며 여기서 神市의 국민적 합의(Public Agreement)가 도출되는 것입니다.

마음도 통하고 몸도 즐겁도록 하려다 보니 오늘 이런 좋은 풍광미식(風光美食)도 음미하면서 신선도를 즐기는 것입니다. 풍류도는 신선도입니다. 신선도는 신(神=自由), 선(仙=平和)으로서, 이렇게 자유스럽고 평화스러운 대자연의 품속에서 모두가 신선이 되는데 구차스런 생각이야 무삼하리오. 풍류라 하면 피부에 와 닿는 그대로 가벼운 풍류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비록 이와 같은 가벼운 풍류라도 해로울 것이 없고 유익한 것이지요.

    靑山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蒼空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욕심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風流酒洗百年塵이라!

그러나 장차 이 나라를 이끌고 이 민족을 선도할 소임이 주어진 또 사명의식을 느끼고 이곳에 모여든 우리들은 일신상의 풍류도 좋지만 좀더 심오한 배달의 도를 논하고 실천하는 준비활동의 계기가 되어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유사이래 조의선인, 화랑도, 문무도 등 역사적 풍류집단이 있었고 수많은 신선도인 선비들이 있었으며, 근대에 와서 학즉동학 도즉천도(學則東學 道則天道)라는 수운(최재우)의 東學에서 증산(강일순)의 大東學으로, 홍암선사(라철)의 大倧學으로, 소태산(박중빈)의 一圓相으로 천도 풍류도는 도학적 철학사상적으로 체계화 조직화 정치화되고 있습니다. 수운이나 증산이나 홍암이나 소태산이나 모두 민족적 대도인으로서 민족적 恨에 사무친 사람들입니다.
한의 문화를 풀어줄 문화는 오직 풍류로서 풍류는 학통(學通)보다는 성통(性通)으로 곧 자성구자(自性求子)라야 이해나 실천이 빠르다고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은 예수 혼자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자성구자(자기 본성에서 씨알을 찾아 깨닫는것)가 아니고서는 단편적인 설명밖에 안되며 여기서 아무리 메주왈 코주왈 외쳐도 저 자신도 두루 뭉실한 그 무엇을 딱 꼬집어 말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알고 있지도 못합니다.

이제 육안(肉眼)문화시대는 지나고 혜안(慧眼)문화시대로서 생사를 초월해야 도에 이른다고 합니다. 물질의 조국이 없어서도 안되지만 마음의 조국으로 원시반본하는 것입니다. 현상계의 가상(假想)만이 아니라 실상계의 진상을 추구하며 가유(假有)가 아니라 진유(眞有)이어야 할 것입니다. 형이상학이나 형이하학도 아니며 형이중학의 시중(市中)철학, 天時 地利 人和를 살리는 三一哲學으로 神觀을 통일해야 할 것입니다.
한철학은 삼일일체성원리(학문:진, 도덕:선, 예술:미)를 가지고 전인교육을 강조합니다.⑤

미국에는 Pragmatism(실용주의)이 있었고 이스라엘에는 Zionism이 있듯이 한국에는 전래의 배달도인 Hanism이 있습니다. 주체는 일신이요 작용은 삼신인 삼일철학(Hanism)은 풍류정신 선비정신 장인정신 등 신선도인 사상으로의 多勿정신입니다.
영토적으로는 수천만 도시민의 향토적 고토로의 귀환(송출)이며 정신적으로는 대자연적 신시사상으로 마음 문을 여는 개벽입니다. 땀흘리는 노동의 기쁨과 대자연의 고마움을 깨닫고 검소와 절약의 미덕으로 욕심을 없애지 않고서는 인륜도덕의 제고는 어렵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 사막에서 갈증과 굶주림에 지치게 되자 ‘차라리 노예가 된다면, 나일강의 물로 목을 축이고 이집트 사람들이 던져주는 빵부스러기로나마 허기를 달랠 수 있지 않느냐’고 투덜거릴지라도 이들을 설득하여 노예의 땅을 버리고 福地를 찾아 강행군을 하듯이 한배달의 길은 외로운 고난의 길이 될지 모르겠으나 가지 않을 수 없는 한울(한 우리, 하늘, 한누리)의 길입니다.

    동해물로 소세(掃洗)하고
    황해물로 발을 씻고
    백두산 천지물로 목을 축이고
    태백을 벼개삼아 몸을 뉘이니
    뭇별이 아스라이 속삭이누나
    삼공의 주악과 칠선녀의 원무를 받는
    오롯한 한자리에 변함이 없이
    슬기로움과 고이함이 다함이 없는 님이시여
    온갖 무리의 일들이 틀에 다 짜이니
    길을 잃어 헤매던 모든 질서가
    이제야 仙家로 찾아옵니다. (笑明龍人 李圭贊의 詩).

    三界가 혼돈하니 무명성이 소명하겠구나
    치화가 음양에 차니
    원통함이 4海 같거늘
    교화가 양극하니
    비통함이 태산같거늘
    이는 전세에 두극 같이 않은
    현묘한 삼극의 나툼이니
    하늘같은 평안함 함께 하리라(上同)

    한알에 뜻을 심어
    고이 키워 가꾸면
    씨앗이 오래 가리(天符經, 上同)

    온누리에 오롯한
    고운님 맑은 웃음
    고이 슬기 고마움(氣符經, 上同)

달걀을 깨면 병아리가 나옵니까? 그러나 병아리는 분명 달걀에서 나옵니다. 천부경을 분해한다 해서 바로 배달도가 나오지 않지만 그러나 천부경에서 배달도가 나옵니다.

인체는 종삼횡사(從三橫四)로 되어 있습니다. 運三四成還, 七數가 神用數, 北斗七星 머리數입니다.

        잠을 깨라. 머리를 들어라.
        노마 노마 금노마
        인두팔로 찌질노마! (세간의 속담)

동녘 밝달땅(倍達)의 화부도사(火夫道士) 밝보살(倍達徒)이 큼우직한 노(爐)에 벌건 불을 지펴 백두족(白頭族)이 쓸 금관을 두들겨 만들고 있습니다.
夫婁 夫婁 딱딱, 대장장이의 풀무질 소리, 弗亞 弗亞 딱딱. 이 땅에는 금이 많이 납니다. 二金 三金만이 아니고 저 북쪽의 四金까지 다 녹여 붙일 것입니다.

이제 한세상 변해 가는데 금전만능 잔꾀(잔꾀경영, 잔꾀정치,.....)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어둠은 가고 환한 제7 한주의 통일공화국이 불그므레 밝아오고 있습니다.(현재는 제6공화국 제3기)
 

    세기의 백발을 추겨들고
    북으로 사모친 바이칼을 내려보며
    곤륜산 히말리아산으로
    찬란한 태평양 넓은 바다로
    백두는 외친다.-

    “너 세계야 들으라!
    이 땅에 내 나라를 세우리라
    내 천만 년 깍아 세운 절벽의 의지로
    내 歲歲로 모은 힘 가다듬어
    온갖 불의를 즉쳐 부수고
    내 나라를 -
    ‘한 나라’를 세우리라.
    내 뿌리와 같이 깊으게
    내 바위와 같이 튼튼하게
    내 絶頂과 같이 높으게
    내 天池와 같이 빛나게
    세우리라. -
    자유의 나라!
    평화의 나라!
    사랑의 나라!"

    백두산은 이렇게 외친다!
    백성은 이렇게 외친다!⑥

여러분, 우리는 지금 아름다운 금수강산에서 풍류를 즐기고 있습니다. 우리 활량(活良, 閑良) 신건달(新乾達)들은 지금 힘차게 배달의 길을 가고 있는 중입니다.
                                                                                                 
                                                                                                                            1990. 2. 23. 조한범

註解
①김상일 저 〈한밝문명론〉참조. 한이 원형이라면 알 감 닥 밝은 조형이다.
②〈한밝문명론〉p.33 및 민영현의〈한의 存在一元에 관한 基礎硏究〉p.55
③〈한밝문명론〉참조
④〈한밝문명론〉p.24
⑤최민홍 저 〈한철학과 현대사회〉p.169
⑥曺基千의 〈백두산〉p.128쪽을 인용, 필자가 고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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