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주의 새 이념의 발상과 테두리

 

인류의 삶의 방식은 급작스럽게 변화되거나 일시에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장구한 세월을 통하여 변화되는 생활여건과 환경에 따라서 적응되어 가는 과정중의 경험에 의하여 규정지어 지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적 사실을 투영하여 진보적 미래를 개척해 가는 거울로 쓰자니 과거의 역사와 그 역사철학을 현재의 정치·사회현실과 시대적 과제로 부단히 대비시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목적의식을 배제·외면하고 기계적·관습적으로 현실성, 적시성이 없는 잡다한 사실(史實)추구에만 집착하다 보니 민족적 정체감(正體感)을 확립해 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역사 연구는 무엇 때문에 하는지 모르며 그 내용도 종잡을 수 없는 국사교육에 종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듣기 좋은 말이 아니고 사실이 유구하고 자부할 만한 역사와 그 역사철학에 먼저 바탕을 두고 다음에 변화하여 가는 세계사적 조류에 따라서 우리의 새 주의, 새 이념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양식 주관으로 본다면 흔히들 말하기를 대서양시대, 이제 한국 즉 동양사상과 교섭하여 태평양시대가 펼쳐지면서 새로이 세계를 통괄하는 사상이 나온다고들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보더라도 기독교문명권의 서양철학 사상 외에도 온 세계 종교사상이 혼재하는 한국에서 본래의 배달도적 도학사상을 근거로 하는 변증법적 새 이념이 나올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러한 추세에 보조를 맞추기라도 하듯 서양 위주의 미소 양대 블록 체제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다변화 블록체제로 형성되어 가고 있고, 양대 극단의 철학 사상적 근거가 이미 희석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국내적으로도 이미 서양사상의 찌꺼기인 시대착오적 극좌극우 논리의 전개나 극단적 활동이 사회불안의 요소로 인식되어 지탄과 냉대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공감을 얻지 못하고 점점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양대 체제의 권위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사회의 모든 기존의 권위-부모나 스승의 권위, 정치권의 권위, 종교계나 (역사)학계의 권위 등이 이미 무너져 내린 지 오래다. 낡은 질서의 청산을 바라면서도 대치될 새 질서의 등장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아노미(Anomie)현상의 사회, 상호 삼투작용으로 신구의 벽, 동서양의 벽, 이제는 공산·자본의 벽이 허물어져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되어 있거나 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상태다.

세계는 지금소용돌이
이러한 와중에서 온 세계가 지금 소용돌이를 치고 있다. 크게 보면 동구를 비롯한 온 세계가, 안으로는 공장, 학교, 회사.... 온 사회가 요동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혼란의 도가니가 서서히 몇 줄기의 흐름으로 정리되어 가려는 영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가 맞부딪혀 벌어지는 현상, 사상투쟁이 대부분의 갈등을 빚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사회주의와 계급집단주의가 결합되어 생산수단 공공화의 확대로 부(富)의 균점을 모색하려는 급진적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급진적 민중혁명 이데올로기, 자본주의를 신봉하면서 개인 자유의 확대를 위하여 정부의 간섭을 되도록 줄이고 경제활동에 있어서도 자유 경쟁.자율확대를 주장하면서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보수적 자본주의 수호세력인 집단적 보수주의, 정치참여에서는 자유 민주주의를 갈망하면서 경제영역에서는 체제 내에서의 점진적 개혁을 통하여 혼합경제로 부(富)의 공정한 분배를 모색하려는 세력이 공존하는 민주사회의 현실 속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기술집단의 출현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으며, 그 방향으로 개편의 기틀을 잡아가는 맹아(萌芽)가 엿보이기도 한다.

오늘 우리 사회의 혼란은 제대로 된 이념적 정치집단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오늘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기 이념집단들을 대변할 수 있도록 기존의 정당들이 좌파 사회주의 정당, 중도 사회민주주의 정당, 보수정당 등으로 개편되어 변신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정당의 출현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 정치도 시대착오적 네오마르크시즘, 폭력적 혁명론으로 공장과 가두에서의 살벌한 투쟁과 갈등을 지양하고 의사당에서 논리로 투쟁을 전개하는 성숙성을 보일 때가 되었으며 이념 중심이 아니고 인물 중심으로 이합집산하여 정치적 노선이 선명하지 못하고 불투명한 무정견, 무이념 정당이나 정치인들은 정치일선에서 활동하기에는 부적절한 시기가 도래했다<88.12.20 조선일보 시론(時論), 이상우 교수의 「사상갈등의 민주적 극복」참조>
이러한 흐름은 우선은 정치인들이 주도하고 있으니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더라도 우리는 민족사를 투영하고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가장 우리답고 우리에게 알맞으면서도 세계 인류에게 보편성이 있는 이념철학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창조적 이념철학을 제공해줄 수 있는 능력의 계발(啓發)이 급선무라 하겠다. 이 혼란의 도가니에서 새로운 이념철학으로 무장한 한줄기 흐름의 힘이 북을 치고 노래하며 행진을 하게 되면 다중(多衆)은 저절로 이끌려 휘몰려서 큰 흐름으로 이루어 나가게 될 것으로 전망이 된다. 만삭이 된 임산부의 몸과 같이 허물림의 고통을 안고있는 탄생의 천시(天時)를 맞이하고 있다고 보겠다. 북한 내부에서도 개방과 개혁세력의 대두가 필연적이겠지만 남한 내에서도 민주화와 통일의 주체세력이 될 무리지움이 서서히 그 정체를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몇 번의 논술을 통하여 한주의 민족사관이라는 것을 단편적으로 거론하여 강조한 바가 있지만(계간 한배달 제1, 2, 3호 및 졸저「한역사 한사상」)우선 그 외 몇 가지 책자를 참고로 소개함으로써 필자가 생각하고 있는 이념철학의 테두리를 암시해 보고자 한다. 홍사덕 저 「나의 꿈 나의 도전」, 한승조 저 「한국의 정치 사상(과거, 현재, 미래)」, 정재경 저 「한민족의 중흥사상」, 박찬종 저 「박찬종 선언」등을 참조하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이념의 방향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다만 그 명칭에 있어서 민주적 복지민주주의, 민족적 복지민주주의, 민주적(복지)사회주의, 사회 민주주의 등 사람마다 나름대로 특색을 갖게 될 것이나 전반적인 내용은 대동소이한 중정지도(中正之道)를 모색하고 있다고 보겠다.

앞서 극좌나 극우라는 용어를 몇 번 썼는데 강경 극좌나 극우를 퇴화좌익 퇴화우익으로서 복고적 원심작용을 한다면 세련된 좌익이나 보수우익(예컨대 중도보수라고 표방은 하지만 보수우익적 경향)은 진화좌익, 진화우익으로서 진보적 구심작용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구식(舊式)좌익이나 우익은 양 익(兩翼)으로서 만나기 힘들지만 신식 좌익이나 우익은 기존의 두익(頭翼)으로 전향(前向)하여 진보적 협조적인 ‘한 주의’체제를 이루어 갈 수가 있다. 우리가 그려보는 ‘한 주의’는 기하학의 좌우 대칭축(x -x′)에서 본다면 보수 중도 내지 진보 중도적 입장을 유지하며 상하 즉 남북대칭축(y-y′)에서 보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교량적 안정세력인 대다수 중산층을 지향하는 구심적 원융(圓融)사상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물줄기를 이루어 나갈 한주의의 체계화를 절실히 요구하게 된다. 먼저 용어에 대해서 살펴보면 엄밀히 따져서 민주주의(Democracy=Demos, the people + Kratos, rule, authority =rule by the people)라는 말은, 봉건영주나 왕권의 군주주의에 대한 대칭용어로 보겠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자유 민주주의 즉 자본주의만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세계에서도 인민민주주의라 자칭하여 민주주의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민주주의라 하면 공산 사회주의, 제국주의, 군국주의 등 전제독재체제에 대한 상대적 용어이며 시장경제를 토대로 한 자본주의 체제로서 자유민주주의를 뜻하게 된다. 그러면 종교에도 교주가 있고 집에도 가장(家長)이 다 있으며, 따님(God of earth)철학에 의하면 존재가치를 갖고 우주자연계에 존재하는 만주(萬主)가 다 있는데, 영주나 군주의 시대가 지나고 인민주권의 민권을 표방하는 민주라는 용어가 있으면 한주의라는 말에도 주권을 가진 주체의 이름을 포함·명시하는 것이 의당하지 않을까 생각될 것이다. 그런 표현이 없으니 한주의에서는 누가 권력의 주체란 말인가. 여기에 대하여 이제는 주권재민의 민주라는 말도 구태여 들먹거릴 필요가 없는 고식적 용어화 화석어화 되어감을 느끼게 되고 통일교에서는 하나님주의라는 말도 있지만 권력의 주체에 대하여 논할 시기는 지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의라는 용어자체도 꼭 필요한가 하는데 필자는 회의를 느끼고 있다. 배달도라는 뿌리깊은 역사용어가 있지만 지금까지 고도로 서양적 정치철학에 젖어버린 시대에 배달도, 선비도, 왕도라 하면 정치용어로 이해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관념으로 비추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한주의라 부르기로 제안한 것이다. 좋은 이름이 창안되기를 바라지만 한마디로 한주의란 바로 배달도를 의미하는데, 물 흐르듯 사는 것이 법(法:물 수자 변에 갈 거자)으로서, 자연스런 인간의 도리대로 삶을 영위해 나가는 방식을 궁구(窮究)하는 것이다.

하늘. 땅. 인간의 도가 풍류도
하늘이 열린후 땅이 생동하고 인간이 춤추는 3재(三才)의 도가 풍류도다. 이것은 바로 환웅천황의 신시(神市)사상으로서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인류를 구원하는 제3의 사상은 태고부터 있어오던 이 한사상이다. 이 상고의 도치(道治)에서 덕치(德治)와 예치(禮治)의 왕도(王道)정치가 파생되어 나오고 다음에는 법치(法治)로 진화되어 과도하게 세분화 복잡화되었으나 아무리 수많은 법을 거미줄 같이 얽어 만들어도 그 부작용과 문제점이 풍류적 인간성을 회복하게 되면 근본적으로 해결이 될 것이다. 이것은 다시 법치에서 덕치로 또 도치로의 환원을 뜻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의 뿌리는 종교라 할 수 있고 종교 또한 그 교리속에 담겨진 이상(이想) 사회를 구현하기 위하여 합법적 정권획득을 기도 할 수도 있다. 요컨데 정치는 제민혁세(濟民革世)를 위하여 종교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종교는 제생의세(濟生醫世)하기 위하여 정치의 협력을 희구한다.

정치권력이 완전하려면 의의있는 목적과 비젼에 의해 구축된 권위와 정통성에 의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정치권력에 권위와 정통성의 후광을 입혀주는 것이 바로 종교이다...... 종교가 정치를 뒷받침하고 정치가 종교에 봉사할 때 비로소 안정될 수 있다..... 종교는 정당성의 보증자이며 정치는 종교에 부합되는 지상권위의 수호자이다....(한승조 저 「한국의 정치사상」, 354쪽, 정치와 종교).

우리 역사상 역대 왕조들이 기백년간의 긴 왕조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숭천경조의 신앙심과 불교. 유교의 영향 때문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물리적인 강제력에만 의존하는 왕권은 50년 또는 100년을 넘기가 어려우나 종교와 표리관계를 유지한 고려·조선조는 놀라울 정도의 견인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승조 저「한국의 정치사상」, 357쪽).

필자가 여기서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거론하게 되는 것은 한배달도의 종교적 성향과 교화임무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배달도 즉 풍류도의 깊은 내면을 인식치 못하고 가벼운 풍류 정도로만 오해될까 하는 노파심이다.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대종교 등 신흥민족종교는 풍류배달도를 기층사상으로 한 고도로 정치화된 종교로서 새로운 배달도의 진로를 잘 예시해 주고 있다.

정치와 도덕은 인간문제의 근거에서 결코 분리하여 볼 것이 아니라 유일의 人乃天 생활에서..... 천도교는 세상을 새롭게 함에 있어서 정신문화를 존중하는 동시에 물리적 제도를 또한 중대시하여 양자를 병행케 함을 제정일치(祭政一致)라 함이니라 (「천도교경전」).

종교와 정치는 세상을 운전하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으므로 어느 하나라도 기울어지면 완전한 세상이 될 수가 없다..... 부패해진 종교와 정치를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그 시대의 활물(活物)을 만드는 자가 곧 구주(救主)니라(「원불교 전서」).

1960년대부터 한국의 기독교계에서는 공산주의 정치세력의 전략전술에 발맞추어 반정부·반체제운동을 벌이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러한 친공좌경의 교회활동은 정교융합·제정일치의 시대에서 정치우위의 시대로 역행함을 보여준다. 종교가 독선, 아집, 편견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대립과 반목이 극심한 상태에서는 정교분리와 병존(倂存)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보편성 합리성 통합성을 갖게 된다면 정치로부터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정교가 표리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종교가 표면에 정치가 이면으로 물러남이 인류사회의 발전방향이 되는 것이다.(상동 「한국의 정치사상」, 366쪽).

이렇게 추론만 해가다 보니 풍류 배달도라는 것이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될는지 모르겠다. 어떻든 세계정부의 이상적 꿈을 실현하는 수단과 소재는 현재 우리의 손안에 있다(최민홍 저 「한철학과 현대사회」, 168쪽)는 것만 이해하면 될 것이다. 원래 내 것이던 것이 남의 것으로 되었는데 남의 것이 좋은 것인 줄로만 알고 외래사상으로 두만(頭滿)이 되어 있으나 다시 백두(白頭)의 기상으로 세련되고 세뇌된 두만이 되어 세계로 뻗쳐 나가야만 할 것이다. 오늘날 영, 미, 호, 카나다. 뉴질란드의 앵글로 색손족이나 독일의 게르만족, 프랑스의 라틴족, 소련의 슬라브족, 이스라엘을 비롯한 유태족, 지나족이나 일본족이 민족을 버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민족주의와 민족문화를 오히려 세계화(Pax-)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난세에 대치할 세계적 대사상을 희구(希求)하는 것은 아마도 어려운 일이라 생각되며 그들이 간다해도 그들의 거대한 국수적 민족주의에 그치고 말 것으로 예측된다. 이에 비하여 우리는 배달민족주의와 그 역사철학관을 더욱 강화하고 확대하여 세계화(Pax-Koreana)해 나가야 할 가치의식을 느끼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한의 유신’-‘한유신(大維新)’으로 교육법 1조에 명시되어 있는 홍익인간의 정신을 실천해 가자는 것이다.

우리는 유신이라고 하면 한때 대부분의 언론에서처럼 매도되고 말만 들어도 노이로제에 걸리는 것 같았는데, 원래 유신이라는 말은 좋은 말로서 옛 뿌리를 근본으로 하여 새 열매를 낸다는 뜻으로 간단히 아래 그림으로 도시해 볼 수 있다.

유신은 심장의 활동과 같다. 묵은 피를 걸러서 새 피를 쏟아내는 심장의 역할이 유신활동이다. 묵은 피라하여 단절하고 내버리면 당장에 쓰러져 죽는다. 묵은 피가 심장을 거치면서 산소를 공급받아 신선한 새 피로 변한다. 옛것을 살려서 미래창조의 활력소를 되찾는 것이다. 유신의 역사를 보면 고대 지나(支那)역사에 기명유신(其命維新)이라는 말이 있었고 한국에서는 대원군 시절의 함여유신(咸與維新)과 박정희의 시월유신(十月維新)이 있었으며 일본은 명치유신의 성공으로 근대화 되었다. 서양에서는 유신이라는 말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영국의 권리장전, 불란서의 대혁명 등 시민운동을 유신으로 볼 수 있다.

백두유신은 세계유신
이것은 침체에서 생동감을 불어 넣어주는 하나의 정신혁명 사상혁명을 달성하는 시민운동이다. 따라서 영어로는 Revitalization이 될 것이다. 제3공화국의 10월 유신은 적지않은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기는 했지만 어떤일을 성취하는 데는 우리 풍습에 삼(三)세번 또는 상(常)세번 한다고 한다. 대원군의 함여유신 박대통령의 시월유신을 거쳐 이제 삼세번째인 한의 유신 즉 백두유신(白頭維新, The human revolution of Hanism)은 곧바로 세계유신(World-wide Revitalization)이 될 것이다.

백두유신<새마을 운동적 의식분야에서는 일명 백의유신(白衣維新)>이라는 민족사적, 나아가 세계사적 공동의 가치 이외에 지금 이시기에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가치체계를 발견할 수가 없다. 필자의 표현이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재야 민족사학자나 한철학자들의 궁극적인 뜻이 이 백두유신의 구현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가치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확실한 실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의 역사를 한주의 민족사관으로 재발견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동시에 왕조사 주류의 기술방식도 역사주체로서의 민중사 인민사 겨레사 쪽으로 쓰여져야 할 것이다. 필자는 한주의의 실체를 논하기 전에 이념투쟁의 허상이 빚어낸 금기시 된 용어, 왜곡되어 본래의 뜻을 잃어버린 민중과 인민, 조선이라는 용어를 평범한 본래의 언어 그대로 되찾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세계는 이념의 국경은 허물어지고 민족의 국경이 형성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민중이란 구체적으로 농어민, 월급쟁이, 중소상공인 등 근로자를 비롯한 도시와 농촌의 일반 서민과 중산대중을 대변하지만 여기서는 잠시 개괄적인 민중이라는 용어의 뜻을 짚어보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제 우리는 민중을 바라보는 시각의 대전환을 경험해야 한다(「박찬종 선언 」,121쪽).
말하지 않는 백성의 말-그것은 바로 민중의 염원인 것이다. 민중을 실체개념으로 고정화 시키지 말고 의미차원에서 이해할 때 이것이 바로 민중의 염원으로서의 민중성(民衆性)이다. 민중성이란 그래서 <일상적으로 전개되는 인간으로서의 삶자체>를 말함이다. 그것은 민중이념하고는 다른 것으로 가장 포괄적인 민중원리이다. 정치인은 이 민중성을 옳게 파악하고 바르게 구현 하는일이 그 임무이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모든 반인간적인 요소들, 즉 비민중성을 제거하는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 민중이란 큰 힘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주고받는 존재이다. ..... 민중을 더 이상 싸움에 패하여 화가 난 운동경기의 난동꾼으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구시대에서 논의된 사실차원에서의 민중론은 이제는 <민중되는 원리로서의 민중성><민중이 민중노릇하는 근거로서의 민중성>이라는 의미차원으로 승화되야 한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민중본질로서의 민중성이 인류역사의 중추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 민중이 정권을 잡고서 칼을 휘둘러 대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제 민중문제의 해결책은 민중원리가 새로이 규정되는 차원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다루어 져야 할 것이다.

민중의 깃발 아래서 얼마나 비민중적인 사건들이 자행되어 왔는지 우리는 냉정히 성찰할 때가 되었다. 민중은 특정인을 위한 고정 메뉴도 아니며 장식품도 아니다. 왜 말하지 않는 다수의 구체적 삶의 군상들이 민중을 팔아 장사해 먹는 소수의 목소리 때문에 덤으로 희생되어야 하는가? .... 이제 우리는 민중이 갖는 허상과 실상을 바르게 파악해야 한다. 정치인은 이제 민중론에 대하여 그 태도를 정립해야 할 시급한 때가 도래 하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민중의 명예를 정치인들이 이해타산에 이용하거나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반민중적인 악습이다...... 그러므로 민중은 도(道)의 정치적.사회적 표현이며, 사랑은 도(道)의 심정적 표현이며, 도(道)는 도(道)의 철학적 표현이며, 하늘은 도(道)의 종교적 표현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민중을 다시 물어야 한다. 묻는 태도가 잘못 되면 대답 또한 잘못 될 수밖에 없다.(「박찬종 선언 」, 123-125쪽, 민중원리로서의 민중성).

인민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추론(推論)해서 바로 잡을 수 있다. 원래 바로 되어 있던 것이 왜곡되어 금기시 된것이므로 본래의 의미대로 평범하게 부담없이 사용될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회의 최하층이 새로운 가치관에 눈 뜰 때 그 사회는 새로 태어난다(미국작가 Ignazio Silone).

이제 한사상의 변증법의 일대비약으로 최상의 가치체계로 믿어지는 한주의에 대해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변증법이라 하니 서양의 이원론적 변증법을 연상하게 될지 모르겠으나 여러 글에서 단편적으로 설명된 삼일철학에 대해서 기억한다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한은 변증법적 결론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초월하여 홀연히 존재해 온 원인이기도 하다. 한이란 흑백의 대립을 종합하여 회색을 만드는 혼합주의가 아니라 흑백의 근본인 빛을 잡게 하는 창조지향적 마음이다. 즉 한은 양면성을 내포하여 분화 발전하는 모태이면서 투쟁의 성격(원심력)만이 아니고 조화합일의 성격(구심력)도 지니게 된다.

'한’은 창조지향적 마음
다음은 정재경(鄭在景)저 「한민족의 중흥사상(韓民族의 中興思想)」이라는 책자의 ‘한국민주주의 이념’이라는 분장에서 주로 인용하면서 필자의 생각을 가미하여 기술하였으므로 원저자의 철학적 의도와는 차이가 날지도 모른다. 미리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한국민주주의인 한주의는 자유를 강조하는 자본주의의 자유민주주의와 평등을 강조하는 공산주의의 인민민주주의를 극복하고 동시에 분단을 극복하는 길로서 자본주의의 자유민주주의 기능위에 평등에 대한 해결마저도 공산주의의 인민민주주의 보다 우월하게 조화시키고자 하는 차원 높은 정책이다. 한민족의 사상체계였던 한얼사상 속에서 이러한 동서세계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상대성 조화성 통일성을 함유한 중심적 이념체계를 발견할 수가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신장에만 역점을 두기 때문에 국가나 사회와 같은 전체를 부차적인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개인은 때때로 방종에 흐르는 폐단이 없지 않고,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국가나 민족같은 전체를 절대지상의 가치로 내세우므로 동시에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국민총화에도 역행하며 우리의 전통적인 사상과는 본질적으로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적인 사상의 현대화로 세계 역사상 한주의 역사주체를 내세워 참다운 인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나친 개인주의 풍조가 사회에 팽배해지거나 카리스마적 전체주의로 개인의 인권을 짓밟는 개인과 전체를, 조화와 협동의 정신으로 대립적 관계인 서양정신을 극복하는 사상이다. 나와 남을, 즉 개체와 전체를 언제나 하나의 조화로운 질서로 보아 온 것이 바로 한국정신이다. 이론(異論)을 대화로 통일하고, 이해로서 대립을 지양하며, 갈등에 앞서 융화를, 투쟁보다는 협동하는 생활원리가 우리의 삶의 철학이다.

등불이 어둠을 위해서 존재하듯 부(富)는 빈곤을 위해서 존재한다.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권력과 특권을 획득하려는 목적의 부(富)는 자본주의의 함정이며 빈곤의 평등은 공산사회주의의 함정이다. 자본주의 진영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자유와 함께 부패가 있고, 법적으로는 평등한 것이지만 경제사회적으로는 계층간의 불평등이 있다. 또 사생활의 방임 등으로 상쇄되어 버리고 마는 대중의 정치적 소외 내지 의제적(擬制的) 참여가 있다. 사회주의 진영의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추상적 자유를 내세워 실생활에 있어서는 제자유가 몰수되고 만다. 대중의 경제적 평등을 빙자한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함께 철저한 투망식 조직체제의 메카니즘에 의한 권력의 불평등이 있다. 그리고 인민들의 정치참여를 내세운 강제 동의식 동원등은 인간의 가장 무서운 함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원리이며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조절하고 사실의 세계인 한국적 현실에서 그 양쪽의 함정을 제거하고 자유와 평등을 달성해 간다고 하는 것이 한주의의 철학이다. 한주의는 서방 자유민주주의의 테두리에 가까우면서도 그 유형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동방민주주의의 체제유형에 속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개인주의 자유주의와 함께 집단주의 협동주의의 요소가 강조되는 사상으로서 개인의 소망과 민족의 소망을 동시적으로 추구하는 이념이다.
따라서 한주의는 변증법적 철학으로서 개인주의적인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적인 동구의 사회민주주의가 접근된 새로운 이념체계로 이해할 수 있으나 자유편향의 자본주의나 평등편향의 공산주의 이 양자를 합하여 만들어지는 변증법적 비약의 일대 드라마이기 이전에 원초적으로 이들을 초월했던 한철학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회주의 국체(國體)로 볼 수 있는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유지해 오던 것으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토대로 한 민족적 민주주의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세계인류를 위한 ‘하나주의’이다. 한주의는 공간적으로는 홍익인간으로서 지구촌 인류를 지향하고 시간적으로는 한맥(韓脈)계승으로 한맥문화를 지향한다. 이맥락에 충실함으로서 자유 평등 사랑이라는 인간고유의 자연성에 부합되는 것이다. 이 환경이 정착되면 평화가 달성된다.

이와 같은 고유철학의 재발견이나 새로운 철학으로의 재구성·창출은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의미에 있어서 더욱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대륙문화와 해양문화가 교차되는 지점이요, 전통사회와 현대사회가 공존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동양문화와 서양문명이 혼존하는 지역인 동시에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맞닿아 있는 지역 즉 동서문제 남북문제 인종문제(황백 첨단 대립지점)등 세계적 양극성이 맞물려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이와 같은 현상에서 대립과 모순을 극복하고 국토와 민족의 분단을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생활의 원리가 제시되어야 함은 시대적 요청이 아닐수 없다.
한국민주주의는 우리의 현실에서 한민족이 주체성을 가지고 발전시키려는 민주주의의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형태이다. 즉 오늘의 세계 조류에서 범인류적 가치인 한주의의 실현을 위한 하나의 주체로서 한민족은 자기의 책임을 부여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 민주주의(일명 조선민주주의)는 한민족(일명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가치를 파괴하는 전체주의적 계급투쟁적인 혁명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또 기존 정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고식적인 미봉책도 동시에 배격하면서 민족의 주체사관을 기반으로하여 민족의 생명력을 가일층 배양해 가는 창조적 이념인 것이다.
따라서 전체주의가 전체 앞에 개체의 평등만을 강조하고 서구적 자유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만을 금과옥조로 내세우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미래 지향적인 민족주의에 입각한 정치철학이 바로 한주의로서 문화적으로는 전통의 재발견 및 계승이며 사회경제적으로는 배분적(配分的) 평등(불공정한 불평등이 아니고 공정한 불평등)이 보장되는 복지사회의 건설이 그 이념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한주의란 한민족이 자기의 역사 위에서 새로운 차원의 민주주의를 실천해 간다고 하는 지구 혹성적 민주주의에 대한 주체적 의미와 그리고 한주의의 실천을 통하여 자기의 역사를 더욱 새롭게 전개해 간다는 민족사에 대한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사에 기여한다고 하는 실로 원대하고 차원 높은 의지의 표현이자 논리 체계인 것이다. 그런데 한주의의 이념과 내용 및 형식에 있어서는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적 정치원리를 토대로 하는 민주적 사회주의가 그 기저(基底)가 된다.(정재경 저 「한민족의 중흥사상」 122-150쪽 참조).

통치를 하는 국가체계인 관료조직이나 국가골격 등에 있어서는 어느 주의, 어느 체제나 대동소이하다고 볼 수 있겠으나 지도이념이 달라질 때에는 그 조직의 운영개념과 운용방법이 확연히 달라지고 그에 따라 나타나는 말단적 현상은 판이하게 달리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성문법 불문법이 큰 문제가 아니고 해방이후 지금까지 수다한 헌법개정, 체제개편처럼 문제 될 것 없이 요점은 그것을 운용하는 국민의 정신과 그 운용의 묘에 달려 있다고 본다.
얼마나 선비(仙人:쎈이:힘쎈이)정신을 갖는냐 하는 것이 중요한 도덕적 척도가 될 것이다.

조선벌판과 반도에서 환국을 세우고 생활 해 가던 조선의 뿌리족과, 지금의 중국본토 깊숙히 진출하여 생활해 가던 조선의 뿌리족들 속에서는, 자연히 효율적 치수사업과 더 나은 사회제도의 염원속에 고립과 분산을 극복하고 서로의 통일성을 지향하는 요구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환국에서는 자신들의 내부단합을 강화해 나갈뿐 아니라 주위의 조선족을 점차 정치, 경제적으로 통합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50-60만년 전부터 장구한 세월을 조선의 하늘과 땅에서 살아온 조선의 뿌리족이 조선민족의 시원을 열면서 건국한 단군조선은 삼극적 세계관에 의한 삼신일체의 도(道)를 사상적 토대로하여 홍익인간의 정치이념이 구현되고 균전법이 실시된 사회주의 제국이었다. …  … 홍익인간의 지도이념은 백성위에 군림하지 않고 백성 속에 들어가 여민동행(與民同行)하는 행동강령을 통해 널리 구현되었다. …단군조선의 균전제는 중국 등의 제후국으로 건너가 정전제(井田制)가 되었다. …  단군조선 국가사회는 이러한 사상, 정치, 경제의 사회주의적 성격으로하여 국가의 출현과 함께 예속노동에 기초한 노예제 사회로 진전되어가는 서양방식과는 달리, 청동기의 출현과 함께 생산력의 비약적 증대가 있었음에도 사회의 지도와 피지도라는 구성 분화가 계급적 지배. 피지배관계로 전개되지 않았다. 당시의 조선민족은 모두 자주노동의 실현속에서 평등한 사회생활을 마음껏 영위한 것이다. (유환희 저「우리 하늘, 우리 땅, 우리의 조선철학」, 125-128쪽, 사회주의제국 단군조선)

한주의의 구현은 제3의 유신인 백두유신과 제3의 새마을정신운동인 백의유신(白衣維新)을 통해서 실천될 수 있을 것이다. 백두유신은 국적없는 정신적 방랑아를 거부하며 공리공론과 신사대주의를 배격한다. 국민의식보다 너무 앞선 나머지 국민과 멀어지는 예언적 정치철학도 아니며 국민의 일시적 감정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려는 정치철학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투영하여 본 우리의 갈 길을 제시하고 인도하는 성실한 안내자인 인류주의 개혁활동이다.
제3의 새마을운동은 제3공화국의 제1 새마을운동, 5공화국의 제2 새마을운동에 이어 사고방식이나 생활자세에 있어서 발상의 전환을 이룩하는 것을 시도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가오는 동아시아의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여 수행해 나갈 주체로서 한민족의 저력을 발휘하기 위한 민족사적 정치발판을 예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역사의 재발견 및 철학과 전통의 재평가로부터 시작된다. 한국의 역사는 재발견되고 재구성되어져야 하며 그럼으로써 국민기풍의 일대 쇄신이 뒤따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단편적이고 측면이다. 항상 흑백논리이고 편견이다. 완전이란 없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원성(圓性)의 보편성(普遍成)을 터득하는 날, 시방(十方)이 하나로 환하게 열리리라(천명일의「空無虛」, 300쪽).

메시아 탄생은 예수의 재림이나 성인(聖人)의 출현이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하느님의 부활이요 정신과 사상의 부활이다. 시대의 소명이요 우리의 사명은 정신혁명 사상혁명이라는 절대명제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편적 구호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세계사 속에 우뚝 일어서느냐 그리하여 인류구원을 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생사의 갈림길이 되는 것이다. 우리 고유의 하느님 사상은 만방인류를 구원할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철학이다. 이 철학에 투철한 한배달 한무리는 민족의 대운하(大運河)를 파고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한주의 역군(役軍), 제2의 광복군이 되는 것이다.한무리(한주의당, 백두당, 백의당)의 사회운동의 역사적 과제는 안으로는 민중적 민족적(민중적 민족주의) 밖으로는 외세지향적(세계화 민주주의)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혁명은 인민에 의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철학을 가진 새로운 사회세력에 의하여 의지(意志)되는 것이다. (「뉴페비안 논집」).

혁명(革命)을 하기 전에 피명(皮命)을 다듬어라. 살아 있는 가죽(皮)속에서 키워지는 용출력(命)이, 죽은 가죽(革)을 뚫고 새 목숨(命)을 탄생시킨다. 작은 일꾼이 됨으로써 큰 일꾼이 되고 남이 돌보지 않는 일에 보람을 찾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바람직하고 나아가서 전체운동과 전체사회를 위해서 기여 하는 것이 된다. 현실적으로 성실한 생활만큼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없을 것이고 주변의 신뢰를 획득할 수 있는것도 없을 것이다. 성실한 생활은 그 자체가 운동가로서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책임질 수 있는 운동가가 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현실에 성실한 가운데 철저한 개량주의자가 되라(유환희 저「조선철학」, 227-237쪽, ‘혁명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참조).

민족고향 앞으로 가!
새역사는 철학이 같은 소수인에 의하여 창조된다. 그리고 대중으로 확산된다. 한주의 민족사를 위하여 협동(투쟁)하는 선구주도 세력은 나오고 있다. 학술적 논쟁뿐만 아니라 일부 학자들이 비아냥거리듯이 학술 아닌 사회운동도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변동에 따른 새로운 학문에 대한 욕구는 당연하며 학계나 사회는 이런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개방적 분위기의 조성이 불가피하게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무언극의 벙어리 역사가 아니요, 민중의 입. 민족의 입으로 유언극의 입가진 민중사.민족사가 전개될 것이다. 민중은 입이 없다던 암울한 역사가 걷히고 만천하에 투명한 조선대륙 조선벌판의 조선민족사가 전개될 것이다. 고향 앞으로 가!하고 구령하는 사람, 모두들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서 고향에서도 안정된 생업에 종사케 하는 것이 정치 잘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고향은 어디인가. 내 개인 일신의 고향은 가야산골이지만 민족의 고향은 우리의 고토다. 저 넓은 조선대륙 조선벌판이다. 북방정책은 위험하지만 할만 한 모험(a risk but a good risk)으로서 제2의 위화도회군은 역사를 거역하는 일이 될 것이다.

 … 그러면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오늘날 우리가 정립해야 할 역사관은 어떠한 역사관인가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오늘의 시대정신과 절박한 민족의 현재적 요구, 그리고 미래지향적 웅도(雄圖)가 투영된 역사관이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이 시대의 민족적 과제해결과 미래의 비전제시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객관적 사실 연구에만 몰두하는 역사가 있다면 이는 죽은 역사요 잠꼬대의 역사일 뿐이며, 또 현재적 욕구를 외면한 채 이미 물러 가버린 식민사관에 대한 철늦은 비판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면 이 또한 무의미한 역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리하여 이제 우리도 지난날의 식민사관이 남긴 패배주의와 자기비하 의식에서 벗어나, 일찍이 동북아를 석권했던 한민족의 후예라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웅비를 앞당기려는 통일지향 민족사관으로 지나간 우리의 5천년 민족사를 조명해 보도록 하겠다(육본 발행, 「겨레의 역사」, 33쪽, 역사를 보는 눈).

김구 선생의 말씀대로 부강한 나라이기보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알차고 성숙된 나라, 도덕적 정신문화가 경제사회를 지배하는 건전한 사회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목표이다. 더불어 사는 천혜의 성역국토(聖域國土)와 고토(古土)를 보존하고 잘 가꾸어 나가면서 지배하고 군림하고 주도하는 한국인이 아니고 존경받는 한국인이 되는 것이다.

어두운 밤에 자지 못하고 우는 자가 동방의 등불을 먼저 본다.
고(苦)가 없는 낙(樂)이 없고 대가가 없는 영광이 없다.
청년들이여! 정의의 활동을 하는 푸른 시절에 격동하는 역사의 전환을 보고 그대로 있을 것인가! (복초 최인의 「민족의 방향」에서)

 *<여기서 한배달은 ‘사단법인 한배달’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아니고 한 뱃속의 핏줄을 타고난 한 민족을 뜻하는 보통명사임>을 밝힙니다.


 

1998년 9월 23일 (수) 조선일보

블레어 총리 日紙 기고
『좌(左)도 우(右)도 아닌 「제3의 길」을 추구한다.』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는 21일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에 자신의 이념적 지향점과 영국 노동당의 진로를 밝히는 흥미로운 논문을 기고했다. 「제3의 길-현대적인 사회민주주의」란 제목의 논문에서 블레어 총리는 영국 노동당의 전통적인 좌파노선이 잘못 이었음을 시인하고 새로운 이념적 선택을 모색해 나갈 것임을 표명했다. 이번 주 뉴욕에서 열리는 심포지엄에도 발표될 논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추구하는 「제3의 길」이란 좌파와 우파의 단순한 타협이 아니다. 정부통제 자체를 최종 목적으로 하는 좌파와, 자유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우파가 모두 이젠 시대에 맞지 않게 됐다는 인식에서 우리는 출발한다. 제3의 길은 경제적 측면에서 자유방임이나 국가간섭의 어느쪽도 아니다. 노조뿐 아니라 경영자에게서도 지지받는 정책을 목표로 한다. 복지-고용문제에선 근로의욕이 저하되지 않도록 세금을 감면하면서 보다 많은 일자리를 창츨하는 내용이 될 것이다. 권리와 의무의 균형있는 조화를 우리는 추구한다. 국제적 레벨에서는 냉전종식 후 새로운 과제로 떠오른 마약, 환경오염 등에 대한 유연한 국제협력을 중시한다. 제3의 길은 발전과 정의의 새로운 동맹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21세기를 향해 역동적 사회민주적인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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