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한사군논쟁을 끝낸다

                                   

                                                                                           (출처 : 한의 뿌리와 미래) by 유래윤

(걸어나옴) ...( ^) ....( ^) (^^) (인사) (--) (_ _) (--) (^^)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유래윤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역사학의 최대 쟁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한사군의 실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사군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어느 정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근 백 년 동안 일제 식민사학과 그것을 계승한 제도권의 강단사학은 한사군 한반도설을 고집해왔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민족주의 사학은 끈질기게 그것을 반박해 왔습니다. 이것은 반도사관을 고수하려는 구사학(舊史學)의 고정불변의 통념에 맞서 한민족 정통사를 복원하려는 강렬한 열망이 한사군 문제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역사는 과연 반도사였는가? 아니면 대륙사였는가? 이제 우리는 고대사 문제의 암초였던 한사군 문제를 파헤침으로서 상고사의 오랜 논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입니다.

잠시 그림을 보겠습니다. 지도에 나오는 그림은 고조선의 강역을 표시한 것입니다. 

점들로 표시된 것은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는 비파형동검의 출토지역입니다. 따라서 이 점들이 나타나는 지역은 고선의 세력범위라 하겠습니다. (우와 넓다@,@)
그런데 당시 고조선은 세 개의 지역으로 분할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요하 서쪽에 보이는 번한, 만주지역의 진한, 그리고 한반도의 마한입니다. 이것을 고조선의
삼한관경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삼한(三韓)하면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 문제는 제가 다음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고조선 삼한관경은 서기전 5세기에 삼조선으로 개칭되었는데요. 고조선의 국호 역시 대부여로 개칭되었지요. 도읍지 역시 장당경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도읍지 이동과 국호변경 역시 다음 기회에.... ^^)

그러던 어느 날, 서기전 194년 한나라에서 망명해온 위만이 요하 서쪽 번조선으로 들어와 나라를 찬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번조선이 망하고 그 자리에는 위만조선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위만은 한나라에 대해 외신(外臣)이 되기를 자청하면서 동쪽에 있었던 진조선(당시 북부여)를 침략했습니다. 대단한 전쟁이 벌어졌는데요. 『
환단고기』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은 위만의 침략을 요하 방어선에서 저지했다고 합니다.

위만조선은 손자인 우거조선 때에 이르러 더욱 강성해졌습니다. 우거는 한나라와 북부여의 교통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습니다.
한나라 무제(武帝)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서기전 108년 한무제는 마침내 우거조선을 침략하여 멸한 뒤, 중국식 군현을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낙랑, 진번, 임둔을 군현으로 만들고 이듬해에는 현도군을 설치했습니다.
이 때 우리 민족은 한족의 군현 설치에 분연히 항거하였고 군현 설치는 차질을 빚게 되었습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한사군의 위치

『환단고기』가 전하는 한사군의 실제 위치


한 군현 문제의 초점은 과연 종래의 주장대로 한반도 북부에 있었느냐 아니면 대륙에 있었느냐하는 위치문제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것을 규명하는 열쇠는 한 군현 설치의 출발점이자 우거조선의 도읍지 왕검성이 있었다는 낙랑의 위치부터 찾는 데 있습니다. 현재 학계의 정설로 간주되어온 낙랑군 대동강설(재평양설)은 이에 반론을 제기해온 여러 학자들의 문헌고찰을 통해 많은 모순이 발견되었고 낙랑군 재평양설을 부정하는 근거로서 제시되어 왔습니다.
먼저
{후한서} [동이열전]에 수록된 문제의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후한의)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서기 111년)에 이르러 부여왕이 드디어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낙랑을 치고 관리와 백성들을 살상하였다.

이 기록은 2세기초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존의 주장대로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 대동강에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부여(동부여)군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라이벌 고구려의 수천 리 영토를 아무 제지도 안 받고 그대로 통과했다는 말이 되며 개선할 때도 역시 무사통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에서,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은 옥저지방을 유람하고 있었는데, 낙랑왕 최리(崔理)가 그 곳에 출행하여 그를 보고 묻기를, "그대의 안색을 보니 보통사람은 아닌 듯한데 혹시 북쪽의 나라 신왕(神王: 대무신왕)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는 드디어 그를 데리고 돌아와 딸로써 그의 처를 삼도록 하였다.

라고 한 기록에서는 낙랑이 고구려의 남쪽 즉 대동강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군(郡)을 다스리는 '낙랑태수'라는 한나라 지방관리의 호칭이 아니라 국(國)을 다스리는 '낙랑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낙랑왕이라는 호칭은 진한(秦漢)시대 이후의 중앙집권적 지방통치제도였던 군현제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죠. 낙랑왕이란 호칭은 낙랑국이 고구려에 복속되면서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한(前漢)시대에 한반도에 있었던 낙랑은 한나라의 낙랑군이 아니라 고조선을 구성하던 제후국인 낙랑국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죠. 낙랑국이 멸망한 대무신왕(대무신열제) 당대에 낙랑군의 낙랑태수는 따로 있었습니다. {동사강목}의 기록을 보면 "이 해에 낙랑 사람 왕조(王調)가 태수(太守) 유헌(劉憲)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樂浪太守)라고 자칭했다"고 했습니다. 전한시대에 국가로서의 낙랑국은 낙랑왕 최리의 나라이며 한사군의 낙랑군은 '유헌'과 '왕조'가 태수로 있었던 군(郡)이었습니다. 증선지(曾先之)가 편찬한 {십팔사략(十八史略)}에 의하면 한이 왕준(王遵)을 보내서 유헌을 죽이고 낙랑태수가 된 왕조를 공격하니 낙랑군 사람 왕굉(王 ) 등이 왕조를 죽이고 한에 항복했다고 합니다. 왕굉은 한나라 낭야왕 중(仲)의 7대손이다. 그러므로 한사군 낙랑과 낙랑국은 다른 것임이 확인됩니다. 그렇다면 대동강 부근에 있었던 낙랑국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요?
{북부여기}에 따르면 BCE195년에 낙랑왕 최숭이 난하유역에서 현재의 대동강으로 이주했다고 했는데 바로 이 기록에 주목해야 합니다.

임신 원년(BCE169) 정월 낙랑왕 최숭(崔崇)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BCE195)년의 겨울이었다.(壬申元年 正月 樂浪王 崔崇 納穀三百石于海城 先時 崔崇自樂浪山 載積珍寶而渡海至馬韓 都王儉城 是檀君解慕漱 丙午冬也.)

즉 {삼국사기}에 기록된 낙랑왕 최리는 최숭의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낙랑군은 최숭이 마한 왕검성(지금의 대동강 평양)으로 오기 전의 원래 위치인 난하유역의 낙랑에 있었던 것이죠.

낙랑왕 최숭이 마한 수도로 가게 된 것은 왜일까요? 

당시 북부여 해모수 단군의 설득으로 진조선 오가 공화제가 해체되었는데요. 

이때 막조선도 마지막 왕 맹남(孟男)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난하지역의 낙랑왕 최숭은 대동강 부근에 막대한 재물을 갖고 와서 낙랑국의 새 도읍지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의 위치인 난하( 河)지역에는 낙랑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겨진 것은 물론이죠. 

따라서 이 때의 낙랑국은 난하 부근과 대동강유역 두 군데에 걸쳐 있었습니다. 

나중에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낙랑국은 난하부근의 영토를 상실한 것이지요. 

그 당대의 기록인 {회남자(淮南子)}의 주석에,

갈석산(碣石山)이 요서군(遼西郡)의 경계에 있나니 낙랑군 조선현(朝鮮樂浪之縣)이다.({淮南子} [時則訓] 第五. "碣石在 遼西界. 朝鮮 樂浪之縣也.")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갈석산은 난하 하류에 현재도 뚜렷이 남아있는 갈석산을 말하며 연나라 장성의 동단인 양평부근이요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끝입니다. 따라서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낙랑군은 대동강이 아니라 난하 하류의 갈석산 부근이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되는 중국계 유물은 무엇일까요?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해방 후 강단학계는 그 유물들을 근거로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 대동강임을 입증하는 단서라고 결론을 내리고 한사군 한반도 설 및 우거조선의 왕검성이 지금의 평양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러나 그 유물들을 잘 살펴보면 전한시대의 유물은 보이지 않고 약 2백 년 뒤의 후한시대 또는 그 이후의 유물들만이 출토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출토 유물 가운데 연대가 확인되는 것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92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발굴한 대동강 유역의 제1호 고분에서 출토된 화천(貨泉)인데, 화천은 왕망(王莽) 때 주조된 청동제 화폐입니다. 왕망은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황후(皇后) 일족이었다가 서기 8년 황위를 빼앗아 신(新)을 건국하였지만, 불과 15년 만인 A.D.23년에 망했습니다. 그런데 이 화폐가 한반도에 유입되어 통용되다가 무덤에 들어가기까지의 시간을 고려하면, 전한의 무제가 우거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BCE108년 무렵의 유물이 아니라 왕망의 신(新)나라를 무너뜨리고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가 대동강 지역을 점령한 서기 44년 이후의 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무신열제(大武神列帝) 20년 제(帝)는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동압록(압록강) 이남이 우리에게 속했는데 애오라지 해성의 남쪽, 바다 근처의 여러 성들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第六. "大武神列帝二十年 帝襲樂浪國滅之. 東鴨綠以南屬我 獨海城以南近海諸城未下." )

대동강 부근의 낙랑국이 고구려에게 복속된 것은 A.D.37년이었습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왕망(王莽)의 신(薪)나라가 멸망하고 광무제(光武帝)가 후한(後漢)을 건국했는데, A.D.44년 광무제는 바다를 건너 대동강 지역을 점령하고 군현을 설치하였습니다.

고구려 대무신왕 27년(A.D.44) 가을 9월에 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군 현으로 만들었으므로 살수(薩水) 이남은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第2 〈大武神王〉條. "二十七年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 取其之爲郡縣 薩水已南屬漢.")

다시 말해서 대동강의 낙랑국을 고구려가 점령했는데 이 지역을 다시 후한이 점령하여 군현을 설치한 것입니다. 따라서 전한 시대에 한반도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기존의 통설은 억지주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주목해야 할 사실은 후한 광무제는 고구려 대무신왕(대무신열제)이 점령한 대동강의 낙랑국을 점령하여 군현으로 삼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두 개의 낙랑군이 만들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한서(漢書)}를 저술한 후한시대의 반고(班固)가 전한시대의 낙랑군을 한반도 대동강으로 옮겨놓고는 후한시대에 한반도에 설치된 낙랑군의 속현들을 모조리 전한시대로 소급하여 위조한 것입니다. 중국문헌들에 낙랑군 위치를 대하여 엇갈리는 기록들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죠. 따라서 후한 광무제 이후의 한중 문헌에 나오는 낙랑군에 대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출토되어 보고된 유물 가운데에는 위조품도 더러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의 치유불능의 고질병인 역사 날조극은 얼마전 교과서 왜곡파문에 이어 구석기 유물조작이 폭로되면서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세계 고고학사상 유래가 볼 수 없는 조직적 유물조작만행은 일제시대에도 조선사편수회와 어용식민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으로 한국사를 한반도의 울타리에 가둬놓기 위하여 한사군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집요한 날조행각을 벌였던 것이죠. 그 심각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한 가지 사례를 든다면 한 일본인 역사학자는 위조한 봉니(封泥)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으로써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부터 거액을 보상금으로 받았는데 조선사 왜곡에 앞장섰던 이마니시류(今西龍)마저도 그것은 위조라고 반발할 정도였다고 하니까요.

난하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새로운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

얼마전 MBC 뉴스(4월 24일자)에서 우리 고대사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놀라운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이것은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결정적으로 입증하는 발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기사를 살펴보면서 마치고자 합니다. (^.^ ) 이번 거 멋있쪄? 


“고조선 중국내륙에”

앵커: 고조선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넓었다는 학설이 제기됐습니다. 고조선 계통의 유물이 중국 요서 지방에서 출토됐습니다. 김성우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 의해 설치된 한 4군은 지금의 평양의 낙랑, 오른쪽에 임둔 , 오른쪽에 진번 그리고 만주 동부와 함경도에 현도가 위치했는 게 통설입니다. 그런데 임둔 이라는 글자가 적힌 유물이 중국 요서지방인 요녕성 진시시(錦西市) 소왕대에서 발견된 사실이 최근 단국대 박물관 복귀대 박사의 논문에서 밝혀졌습니다. 공문서를 넣은 상자 등에 함부로 뜯어볼 수 없도록 진흙을 바르고 직인을 찍은 봉니가 바로 그 유물인데 규격과 서체로 볼 때 한의 중앙 정부가 인근 태수에게 보낸 것입니다. 더욱이 복리 출토 성토에서는 고조선 계통의 유물이 다량으로 나와 바로 이곳이 임둔 소재지임을 밝혀준다고 복 연구원은 말합니다. 임둔 이 요서지방에 있었다면 낙랑은 그 왼편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따라 한 4군의 전신인 위만조선과 고조선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니라 요하를 중심으로 한 중국 내륙쪽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커졌습니다.

인터뷰: 우리나라의 상고사인 고조선이 만주지역으로 비장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그럼 만주지역으로 비정이 된다고 할 때는 우리나라 상고사 전체의 틀이 한번 바뀔 수 있는 거죠.

기자: 이번 연구결과로 일제시대 일인학자들이 한반도 위치설의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했던 평양지역의 낙랑유물 유적부터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MBC뉴스 김성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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