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경쟁인가?

    1.악마의 유혹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이 미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다. 국가가 공인한 돈놀음에 몰두하면서 바다 저편의 월가의 주식시세에 일희일비하고 있다.신문의 경제란은 어떻게 하면 돈따먹을 수 있는가하는 노하우로 지면을 온통 채우고 있다.대학은 근본적 물음들은 멀리한 채(이런것들은 구지식이라고 부른다) 소위 "벤처"라 불리는 1회용 지식의 양산에 골몰하고 있다.학생을 지식 소비자로 보고 그래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듯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주장들이 교육전문가들의 입에서 자랑스레이 나오고 있다.(이런것들을 신지식이라고 부른다.)

 이 들떠 있는 표면밑에서 진행되고 있는 재앙의 짐조를 진정 느끼지 못하는가? 지난 세기에 마구 뿌려 놓은 그 욕구의 배설물들의 악취가 코를 찌르고 있는데.. 그들은 물론 잘 알고 있다고 한다.그리고 보고서도 다 써놓았다고 한다.단지 지금은 바빠서 그것을 검토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왜 그렇게 바쁜가? 살기위해서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겨야 한다고 외친다.내 몫을 가로채기 위해서 다른 경쟁자가 결사적으로 쫓아 오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고 항변한다.그리고 "벤쳐! 벤쳐!" 외치면서 그들은 분초가 아까운 듯 뛰기 시작한다. 아..무엇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음에 틀림없다.

 악마의 유혹이 있다면 바로 이런 식일지 모른다.욥의 이야기를 가상의 구도속에 한번 넣어보자.악마가 하느님에게 나아가 내기를 건다."당신의 창조물인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단지 꼭두각시일 뿐입니다.내가 그것을 보이면 당신의 꼭두각시를 나에게 주세요. 내 각본에 따라 그들 스스로 그들을 파멸시킨다면 내가 이기는 셈이오.사려가 있는 존재라면 당연히 내 각본을 따르지 않을 것이고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면 내 각본대로 갈 것이기 때문이오." 악마는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악마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잘 알고 있다. 형사가 두 명의 용의자를 잡았는데 증거가 없다.그래서 자백을 받아내기로 하고 심문에 들어갔다.두 용의자를 따로 불러서 각자에게 . 범죄사실을 불면 당신은 풀어주고 상대방만 잡아넣겠다고 은밀히 제의를 한다. 둘다 입을 꽉 다물고 있으면 다른 증거가 없어 둘다 풀려나겠지만 결국은 둘다 불고 만다.왜 이런 최악의 상태로 귀결되고 마는 것일까? 상대에 대한 불신이다.결국 내가 불지 않더라도 저 녀석이 불고 말것이므로 결국 신의를 지킨 내만 손해를 보게 된다.다행히 저녀석이 불지 않으면 나는 풀려나게 되어 이익이다.어떻게 되었든 부는 것이 나로서는 이득이다.상대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므로 서로 부는 것으로 끝난다.결국 악마의 성공. 악마의 묘수는 딜레마상황을 만든 다음 경쟁을 붙이는 것이다.

 악마는 또 이솝의 "곰과 두 나그네"의  21세기 새버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두 사나이가 곰에게 쫓기고 있었다.한참 달리다가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말했다."이봐,우리가 아무리 뛰어 보았자 곰을 따돌릴 수는 없네.아무 쓸모없는 일이네."그러자 열심히 달리고 있던 다른 친구가 말했다."이봐,나는 지금 곰하고 경쟁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경쟁 상대는 바로 자네라네.자네 보다 빨리 달리면 어쨌든 난 살아남을 수 있거든." 그러면 빨리 달리는 녀석은 살아남을까? 천만에! 악마는 그 귀결을 잘 알고 있다. 일단 경쟁이 시동되면 뜀박질 은 가속되고 결국 둘다 지쳐 떨어지고 말것이다.곰은 느긋이 뒤따르면서 결말을 기다리면 된다. 결국 불신과 경쟁 이것이 자살 프로그램의 가동을 위한 악마의 전략의 양대축이다.

     2.자본주의,쓰레기의 효율적 양산체계

 자본주의를 받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경쟁의 논리"이다.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이것의 반사회성과 반효율성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이제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경쟁은 자신의 힘을 실증했으며 이제 우리의 신앙이 되고 있다.이 무한경쟁이 그 자체 잔인해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보다 나은 사회,보다 풍요한 사회로 이끌어 갈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다.이름하여 "신자유주의"다.그러나 경쟁에 기초한 이 자본주의의 효율성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심층적으로는 그것은 비효율성의 극치인 자멸 프로그램이다.자본주의적 생산은 마치 버리기위해서 생산하는 것처럼 보인다.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효율성의 미명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 값진 자원을 투입해서 쓸모없는 쓰레기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생산과 소비의 과정을 우리의 상상속에 빠른 필름으로 돌려보면 자본주의란 쓰레기를 가장 효율적으로 양산할 수 있는 체계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암세포의 행태와 비슷하다.암세포는 많이 갖기 위해서 끊임없이 증식하고 그것이 성공할 때 역설적으로 그것은 파멸한다.그것은 증식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정상세포에 비해 효율성의 극치이지만 근원적으로는 비효율성의 극치이다.암세포에게 그것을 설득시켜 보라.모르긴하지만 아마 지금 살아남기에 바빠서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그것을 어리석은 논리라고 탓하기전에 우리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를 심각하게 반성해 볼 일이다.

     3.그렇게 바빠야할 일도 없다.

 우리사회에 팽배해 있는 불신과 무관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그것이 경쟁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유보조건없는 경쟁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관심을 요구하고 있는 교육계,언론계,종교계의 근심섞인듯한 메시지는 자가당착이며 어떤 의미-그 명백한 상관관계를 은폐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죄악에 가깝다.TV에서는 일등만이 살아남는다고 귀따갑게 주입시키면서 바로 이은 특집에서 학생들간의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걱정하고 그 대책을 호소하고 있다.일등만이 제몫을 하는 사회라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그 대전제를 유지한 채 그 관계를 어떻게 회복시켜라는 이야기인가?

 악마의 전략을 와해시키는 길은 우선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다.그렇게 될 때 곰을 피해 달아나고 있는 두 나그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조종을 끊고 서로를 열 수 있을 것이다.마찬가지로 두 용의자는 서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결국 모두가 파멸한다는 위기의 인식을 같이 해야한다.그러나 자본이라는 악의 유혹은 끊임없이 다가와서 서로를 이간질하고 서로를 갈라놓는다.한편으로는 그것이 일시적으로는 잔혹해 보이지만 종국적으로는 함께 더불어 더 잘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속삭인다.그 유혹은 너무 강력해서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삽질을 쉽게 멈출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그러나 그 삽질을 멈추어야 한다.그리고 우리 모두가 왜 그렇게 바쁘게 뛰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템포를 줄이고 주위를 돌아보자.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바빠야 할 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출전;조용현(시조,2000.3월호)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털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우리가 만족할 줄 모르고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불안하고 늘 갈등 상태에서 만족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의 한 부분이다. 저마다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전체의 한 부분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한 부분이다. 세상이란 말과 사회란 말은 추상적인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개개인이 구체적인 사회이고 현실이다. 우리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혈연이든 혈연이 아니든 관계속에서 서로 얽히고 설켜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즐거운 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한때이다. 한 생애를 통해서 어려움만 지속된다면 누가 감내하겠는가. 다 도중에 하차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이 한때이다. 좋은 일도 그렇다. 좋은 일도 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러면 사람이 오만해진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덜 가지고도 더 많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관심갖지 않던 인간관계도 더욱 살뜰히 챙겨야한다. 더 검소하고 작은 것으로서 기쁨을 느껴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이런 어려운 시기를 당했을 때 도대체 나는 누구지.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직위나 돈이나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서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잡다한 정보와 지식의 소음에서 해방되려면 우선 침묵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침묵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는 그런 복잡한 얽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내 자신이 침묵의 세계에 들어가 봐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일상적으로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는가. 의미없는 말을 하룻동안 수없이 남발하고 있다. 친구를 만나서 얘기할 때 유익한 말보다는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말은 가능한 한 적게 하여야 한다.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사람답게 살아간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세상을 우리들 자신마저 소음이 되어 시끄럽게 할 필요은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으나, 침묵 속에 머무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발견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간에 그 내부는 비어있다.


                         

                                               ■ 법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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